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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BY 그대향기 2007-12-12

 

해마다 겨울이 오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면 \'춥다\'라는 느낌보다 훈훈했던

그 해 겨울이 생각나 추위를 이기는 힘이 된다.

그러니까 남편이 갑상선 암을 선고 받고 수술을 했던 15년 전의 겨울.

위로 두 딸이 있고 낳은 아들의 100 일 잔치를 친지들과 남편의 직장 동료들의

많은 축하 속에서 기쁘고 큰 즐거움으로 잘 보내고 난 며칠 후에 남편의 슬픈 소식은

서른 두번째 맞는 내 생일을 생애 가장 잔인한 생일로 만들었고 아이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비극을 만들었다.

수술을 하고 꼬맹이들은 친정엄마를 내려 오시라 해서 맡기고 나는 병원에서 남편 곁에서

먹고 자고를 하는데 아이를 키워본지도 너무도 오래된 엄마는 관절염에다가 고혈압까지

그기다 심장까지 좋지 못한 가운데서도 당장 딸이 울고불고를 하니 어쩌지도 못하고

내려오기는 하셨는데 막내가 워낙에 우량아라서 혼자서 업는것도 힘들어 하셨다.

모유수유를 했는데 아이는 오동통통 정말 복스럽게 살이 올라 장군감이라고들 하셨다.

갑자기 모유를 떼인 아들은 그 어떤 우유를 먹여도 자꾸 토한다고 엄마가 울상이래도

어쩌지 못하고 병원을 지켜야 하는 나는 아이보다 더 울상이 되어 숱한 우유를 바꿔서

먹인게 방법의 다 였다.

소아과도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집 윗층의 젊은 엄마가 자기집 꼬맹이의 비상약이며

좋다는 우유를 갖다가 아들을 먹였지반 낫지를 않아 친정엄마는 애가 타셨다.

젖만 먹여두면 아무 때나 칭얼거리지 않고 순하게 잠만 자던 아들이 할머니등에서

칭얼거리고 할머니를 힘들게 해도 속수무책이기만 했다.

중환자 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고는 아침 회진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에 들러서 두 딸과

엄마의 부식을 잠깐 챙겨 두고 아들을 위해 소아과에 진료를 하고 약을 타고 우유를 바꾸고

주공 아파트 아래 위를 몇번이나 오르내렸던지 나중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천천히

아주 느리게야 오를 수 있었다.

엘리베이트가 없는 서민들의 아파트 주공 13평.

지금은 임대형의 작은 평수 아파트에도 엘리베이트가 있지만 그 때는 5층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트가 없었다.

사업이 어렵게 되고 빚까지 안고 그만 둔 일이라 집 얻을 여유도 없는 형편에서 남편이

따 놓은 위험물과 화학 쪽의 자격증이 있었기에 사택이 제공되는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주공 아파트 13평!

월셋방을 얻어야 하는 형편에서 주공 13평은 감지덕지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직장에서 2년도 못되어 남편이 암으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하루는 앞 동의 아줌마 두분이서 어떻게 아시고 병문안을 오셨다.

소문도 내지 않았고 주위분들에게도 전혀 알지 못하게 조용히 병원엘 왔는데 어떻게....

병 음료수를 따 드리고 나는 또 울먹해서 앉았는데

\"새댁.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신랑 병원비에 보태 써요. 우리 아파트 두 동 아줌마들이

조금씩 모은 거예요.마주 보는 동만 하고 다른 동에는 안해서 얼마 안돼.\"

종이 가방에 모금한 사람 이름과 금액까지 적어서 내미시는 위로금.

나는 또 울었다.

거대한 평수의 아줌마들도 아닌 주공 13평의 아줌마들의 호빵 보다도 더 따끈따끈하고

장작불로 데워진 아랬목보다 더 뜨끈뜨끈한 주공 아줌마들의 사랑에 가슴이 벅차서

돈을 든 봉투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흐느끼 듯 울었다.

남편의 눈시울도 붉어지고 나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 주시던 앞동의 아줌마도 우셨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소문 안내고 병원 왔는데요?\"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파트 통로를 오르내리며 인사 잘 하던 새댁이 한 동안 보이지 않았는데 낯선 할머니가

새댁 아들을 업고 아파트 화단을 왔다갔다 하시길래 여쭈었더니 가르쳐 주시더만.

왜 언니들에게 한마디 얘기도 않고 혼자서 힘들어 하고 그래?\"

아~~

그랬구나.

그래서 알게들 되셨구나.

아들이 자꾸 칭얼대니 아픈 다리를 이끌다 시피해서 4층을 내려가셔서 아래층 화단을

오락가락 하시면서 아이를 달래시다가 앞동 아줌마들에게 남편 얘길 하셨구나.

엄마도 안쓰럽고 우는 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 하고 앞동 아줌마들의 사랑과

관심이 감격스러워서 한참을 울었었다.

몸조리 잘하고 갑상선 암은 다른 암에 비해 완치율이 높다니까 희망을 가지라고 하시고

아줌마들은 가셨다.

생각지도 못한 감동의 선물에 멍~한 기분으로 있다가 열어 본 봉투에는 아줌마들의

친필로 삐뚤빼뚤 본인의 서명과 금액이 적힌 종이가 돈과 함께 들어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액수가 생각이 나지 않지만 30만원 정도 되는 그 당시에는 꽤 큰 액수였다.

평소에 사람 만나면 인사를 꾸벅꾸벅 잘하고 부침개나 호박죽 같은 음식은 많이 해서

아래층 윗층 앞동 마구 퍼 나르는 재미로 주공 13평 아파트를 좁다시피 돌아다녔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의 밥상에 부침개나 별식이 오르면

\"오늘은 몇집 돌았어?\"

알고 하는 말이라 순순히 고백하면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조심해서 사람 사귀라고만

하고 말리지는 않았다.

아파트 앞에서 노점상을 하시는 생선장수 아줌마 한테는 장을 보러 가면서 여름에는

얼음 띄운 시원한 미숫가루나 수박화채를 갖다드리고

아이들 빠을 자주 사는 빵집에는 부침개를 두어장 내밀고

부식가게 아줌마 한테는 맛난 거 많이 갖다놔서 고맙단 말을 하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큰 경제적 손실없이 그저 사람들 좋아하는 성격으로 덜렁덜렁 지내왔는데 그 분들 까지

모금에 동참을 하시다니.....

헛걸음으로 살았던게 아니다 싶어 많이 감격했었다.

남편의 어릴적 친구들도 거금을 내밀고 가셨고 친정 오빠들도 큰 돈을,둘째 시누이는

결혼비용 모은 것을 내밀었고 시아버님도 나중에 몸보신이라도 하라시며 금일봉을

전해 주시는 참 따뜻한 병문안이었다.

감히 보험을 들 만큼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에 순전히 의료보험으로 하는

병원비가 그 때 꽤 나왔어도 여러분의 도움으로 부족하지 않게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고....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아파트를 오가면서 아는 얼굴들에게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내가

잘 모르는 얼굴은 물어서라도 인사를 드렸다.

\"도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사랑하며 잘 살겠습니다.\"

일일이 인사를 할 때 마다 그 분들은 내 피붙이의 일인양 걱정을 해 주시고 힘을 주셨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지금은 우리의 주공 13평의 자리에는 마천루 같은 높은 아파트가 평수가 장난 아닌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그 옆을 지날 때면 언제라도 그 겨울이 생각나고 그 분들이

생각난다.

\"모두 모두 잘 계시죠? 저희들 잘 살고 있어요. 예쁘게 사랑하고 살뜰히 챙기면서요.

아이들도 많이 컸고 조금 있으면 사위 보게 생겼어요.ㅎㅎㅎ

살아가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저 열심히 살아요.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시고 기회가 되면 뵈옵고 싶어요. 어디들 계시는지요? 그립습니다.

주공 13평 시절이....\"

오늘도 내게 주어진 시간에서 누군가 한사람 쯤에게는 기쁨을 주는 삶이라면

성공한 삶이라는 책에서 읽은 말을 가슴에 새기며 새날 새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나로 인해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이 밝아질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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