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술시간은 2시간을 기준으로 하는가 보다. 대장암 말기 환자의 수술 시간도 두 시간을 예상하더니 6시간 이상이나 걸리고... 환자 취급도 않던 내게도 두 시간의 수술 시간을 운운했었다.
아... 다시는 녹색의 수술실에 누워서 눈 부시게 환한 수술용 불빛을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수술 도구의 달그락 거리는 쇠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건만...
녹색 복장의 간호사와 의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참았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 내렸다.
“왜 우세요? 긴장되시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테니 편하게 생각하세요.”
수술용 마스크를 착용한 간호사가 눈물을 닦아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네...”
나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곤 ‘좀 뻐근할 거예요.’ 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링거바늘이 꽂힌 팔목으로 찌르르한 약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깜깜한 어둠속으로 나는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갔다.
어릴 때 신나게 뛰어 놀던 동산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었다. 동무들과 함께 비료포대 한 장씩을 들고서 누가 먼저 올라가나 시합을 했다. 누구에게나 지고는 못사는 성미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입을 통해 들어가서는 폐 속으로 차갑다 못해서 따가운 아픔까지 느껴질 만큼 나는 죽어라고 달렸다.
1등... 정상에 오른 나는 좁다란 내리막길을 보기가 무섭게 비료포대 위를 올라타고는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언덕을 내려갔다.
얼마나 그렇게 놀았는지 모른다. 해가 어둑해지도록 놀던 우리는 빠듯한 시간을 쪼개서 전쟁놀이를 벌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나뭇가지 중에서 따발총과 제일 흡사한 모양을 주워들었다.
“어? 그거 내가 찜해 놓은 건데...!!!”
누런 코가 인중으로 잔뜩 말라붙은 지저분한 녀석이 시비를 걸었다.
“그런게 어딨어? 먼저 주운사람이 임자지!!!”
앙칼진 나의 목소리에도 녀석이 나뭇가지 끝을 잡아끌었다.
“ XXX XXXXX.......\"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욕을 섞어가며 퍼부어대던 내가 녀석을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금방 살을 에는 겨울바람만치나 살벌해졌다.
“일어나세요.!!! 정신 차리세요!!!...”
누군가 볼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내 이름을 불렀다.
수술하며 꿈을 꾸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코흘리개 어릴 적이라니...
기분 나쁜 꿈을 꾸고 나선지, 아니면 어딘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아픔 때문인지 심기가 잔뜩 사나워진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이 아닌 회복실이었다. 아직도 녹색 공간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
설마... 내가 그 살벌한 욕들을 잠꼬대로 떠들어 대지는 않았겠지...
일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스쳐간 생각보다도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추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빨리... 병실로 보내주세요!!!”
분명 있는 힘껏 소리쳐 불렀건만 내 목소리는 잔뜩 갈라진 상태로 아기의 옹알이마냥 작았다.
점심시간이라 조금 기다려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도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잔뜩 날카로웠다. 그 성화로 두 번째 순번임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로 그 곳을 탈출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역시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다.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물린다고 했지 않은가 말이지...
목구멍이 아파서 침을 삼키는 것은 물론이요. 숨을 깊이 들어 마시고 내뱉으라는 간호사의 말을 따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제왕절개를 했던 배 부분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사타구니 쪽에서의 강한 아픔까지...그 곳 말고도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지?...”
엄마의 첫 말이었다.
“괜찮아. 잘 참았어. ”
남편의 첫 말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조차 어려웠다. 2~3일의 아픔을 예상했지만 어둑한 밤이 되기도 전에 느껴지는 고통이 여간 아니었다. 아픔을 느끼면서도 ‘밤이 되면 더 한 고통이 찾아 올 텐데... ’ 구석구석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도 그런 계산까지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을 것을... 차마 뱉어낼 수 없는 그 말을 삼키며 나는 이를 ‘앙’ 물었다.
장을 끊어내고 일명 ‘똥’주머니라 불리는 것을 차고 계시는 환자들 틈에서 감히 명함도 못 내밀 탈장수술을 하고 나서 신음소리를 낸다는 것이 사치 같아서...
그렇게 3일을 꼬박 소변 줄을 낀 채로 기침과의 사투(?)를 벌이며 누워있었다.
수술 3일 후, 조금씩 걸어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도 내 엄마는 휠체어에 나를 태우고 화장실을 데려가는 과잉보호까지 감행하셨다. 그때 얼마나 의사들의 빈축을 샀는지...
“아니, 여기 맨~ 암 환자들 뿐인데 탈장수술하고 휠체어 타고 다녀서야 되겠어요?”
하고 놀리는 주치의 말에도 엄마는 용감히도 맞섰다.
“선생님께서 내 딸 탈장이 터지면 책임지실 거예요? 기침하면 안된다면서 기침을 얼마나 해대는지 애가 반은 죽는구만!!!”
“... 책임은 못 지지만... 그럼 조금씩만 걸으세요.”
자식 앞에 용감한 내 엄마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주치의가 바로 등을 보이고 말았다. 엄마의 사랑 앞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나 역시 생때같은 내 새끼들 기다리는 집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의사의 말이 우선일 수밖에... 엄마가 잠시 잠든 사이 쥐새끼마냥 살금살금 화장실만이라도 걸어가기를 몇 번...
그러던 차에 인상 깊은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듯, 흰 커트머리를 한 할머님의 햇볕에 탄 얼굴은 깊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머리와 대조적인 검은 눈썹이 여간 깐깐한 인상이 아니었다. 커다란 링거 약 주머니를 한 손으로 번쩍 들고 혼자 다니시는 것이 정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할머님께서 1113호로 오신 것은 내가 입원한지 6일째가 되어서였다. 여관을 하신다는 할머니는 항암치료가 모두 끝나서 퇴원을 하셨고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화장실에서 잠시 뵈었던 머리 하얀 할머니께서 들어오시는 거였다. 보호자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 없이 할머니는 몇 시간 동안 혼자서 침대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계셨다.
그 많은 돈 벌어서 다 뭐하려는지 병실 안에 있는 TV는 100원에 30분씩 볼 수는 유료였다. 나는 왠지 모르게 화장실에서 잠시 뵙고 각인 되었던 할머님의 등장이 반가웠다.
모두들 소곤소곤 주고받을 대화 상대가 있는데 할머니께선 아무도 없는 것이 신경 쓰였다.
“할머니, TV 좋아하시면 보실래요?”
내가 먼저 건너편에 할머님께 말을 붙였다.
“아니, 됐어. 돈 무섭어서 나는 안 봐.”
강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의 할머니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할머니의 대꾸에 남편이 벌떡 일어서더니 동전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2일이 흘렀다. 5일간 휴가 계를 내고 올라오신 엄마는 벌써 이틀이나 무단결석을 한 후였다. 홀로 계실 아빠를 생각하니 나 역시 편치 않았다. 이틀 전부터 괜찮다며 내려가시라고 권하는 나의 성화에도 엄마는 버티고 계셨다. 이틀째가 돼서야 나의 강요에 못 이기는 척...
“정말 혼자 괜찮겠니?” 하신다.
“그럼. 아빈이 아빠도 왔다 갔다 할 거고, 친구도 와 있을 거고, 화장실도 혼자 잘 다니고 밥도 잘 먹잖아. 엄마는 내가 애기유?”
“엄마 눈에 자식은 늘 애기여. 아휴...먹고 사는 게 뭐라고... 하긴 무단결석 이틀씩이나 해서 짤리지나 않았는가 모르겠다. 그럼... 엄마가 다시 회사에서 해결보고 올라올까?”
어쨌든 난 그렇게 엄마를 보내 드렸다. 내 말대로 친구와 남편과 그 외 사람들이 들락 거렸기에 심심할 새도 없었다.
잠깐 내게도 보호자의 빈자리가 생길 때면, 건너편 할머니께 다가가서 말벗이 되어 드렸다. 77세의 연세에 비해서 정정해 보이는 할머님은 ‘대장암 2기 말’이라고 하셨다. 이틀 후에 수술을 하신다는데 병원에 입원한지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식사를 하신 적이 없으시단다. 그러고 보니 늘 금식표가 붙어 있어서 할머니 뵙기가 난처했는데 식사를 하시면 고통이 따라서 안 드시는 것이 편하다며 걱정 말고 맛나게 먹으라는 당부도 하셨다.
나는 자제분이 아무도 없느냐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여쭸다. 없으시단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혼하고 행방불명 된지 30년이 가깝다고도 하셨다. 며느리는 이혼을 하자마자 다시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손녀와 손자가 있는데 27살 된 손녀딸은 정신지체 6급으로 조금 늦되다고도 하셨다... 24살의 손자는 멀쩡한데 대학 다니다말고 군대 갔다 제대해서는 제주도에서 산다는 자신의 엄마를 찾아 갔다고도 하셨다.
할머니께서 손녀딸 이야기를 하시다 말고 눈물을 닦아 내셨다.
손녀딸과 얽힌 추억담을 얘기 하시는데 옛날에 나를 키워 주셨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내 할머니 역시 인상만큼은 깐깐했는데...
나는 노인 분들을 보면 왠지 친근함을 느낀다.
그래서 목욕탕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의 등을 밀어 드리는 것이 꺼려지지 않는다.
수술 후에 간병인에 대해서 걱정하는 내게 곧 할아버지께서 올라오실 거라고 하셨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3일만 있다가 내려가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할머님께 그 보다 더 오래 계셔야 될 거란 말씀은 차마 드릴 수 없었다.
할머니와 이야기하며 알게 된 사실들이다.
-그 옛날 경상도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짓던 노부부께선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곤 여관에 취직을 했다. 부인은 청소를, 남편은 경비로. 열심히 일하며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이 대뜸 시골에 내려가 봐야겠다고 했다. 왜냐는 부인의 질문에 꿈에 손자와 손녀가 물살에 떠밀려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다음 날 올라오겠다는 약속 하고 내려간 남편은 일주일이 넘도록 올라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 전화기란 참으로 귀했다.
보름 만에 연락 없이 올라온 남편은 꾀죄죄한 손자와 손녀를 보듬고 있었다.
노부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 며느리는 이혼을 했고 며느리는 떠났다. 아들은 자기 자식들을 어딘가에 버려두고 술에 떡이 되어 지내고 있었다. 남편이 혼자서 여기저기 수소문 해가며 아이들을 찾아내어 올라왔다. 그런데 말 잘하던 손녀딸이 입을 떼지를 않아서 병원에 데려가니 아무 이상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막연하게 그저 무언가에 크게 놀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뭐든 것에 좀 늦되긴 하지만 학교 성적도 중상위권으로 제법 한 몫을 하는 손녀딸의 말이 어눌해서 아내는 고등학생이 되도록 손녀의 학교를 함께 다녔다. 반 아이들의 먹거리까지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요, 교무실까지 극성스레 따라 다녔다. 다행이 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한 손녀가 뒤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신 노부부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서 포도농사를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내는 경찰서까지 따라가서 돈 봉투를 내밀며 하소연을 했다. 손녀를 찾아 달라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의 시간이 흐르고 경찰서에서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내는 경찰서로 달려가서 무섭게 손녀를 다그치며 함께 죽을 것을 권했다. 손녀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잘못을 뉘우쳤다. 그렇게 정신 차린 손녀는 하늘이 도와선지 먼저 일했던 곳에서 그대로 받아 주었다. 그 뒤 틈틈이 손녀의 월급을 모아서 제법 돈을 만들었다. 포도밭을 가꾼 노부부도 돈이 좀 모였다. 아내의 꿈은 손녀에게 아파트 하나 장만해 주는 것과 그 손녀를 극진히 사랑할 손자사위를 보고 나서 세상을 등지는 것. -
수술 날을 받아 놓으신 할머니는 수술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똥’자루를 옆에 차고 다니느냐며 다 늙어서 그렇게까지 추잡한 꼴로 살고 싶지 않다는 등... 수술에 대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셨다.
수술 하루 전에 시골서 할아버지께서 올라오셨다. 할머니보다 더 고집스런 인상의 할아버지께서 진정 병간호나 제대로 해주실지 의문스러우리만치 무뚝뚝하셨다. 두 분은 서로 말도 없으셨다. 가끔 하시는 두 분의 말소리 중간에 ‘핸드폰 사준다고 할 때 괜히 관두라 했구만...’ 이란 소리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틈틈이 나를 당신의 침대로 불러주셨다. 작고 따뜻한 전기장판을 내게 양보하신 할머니는 말벗이 되어준 내게 손을 잡아 주시며 ‘고맙다’를 연발 하셨다. 그리고 이어 하신 말씀이,
“젊은 사람이 왜 이런데 있어. 빨리빨리 낳아서 다신 이런데 오자마라.” 하셨다.
“네!!!”
씩씩한 나의 대꾸에 미소 짓는 할머니 표정이 귀엽기까지 했다.
“할머니, 수술 너무 겁내지 마세요. 수진 씨를 생각해서라도 이겨 내셔야 하잖아요.”
힘을 드리고 싶었다.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한 나의 말이었다.
“수진이는 아직 몰라. 그게 내가 이런 줄 알면 걱정해. 그 애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큰일 나...”
끝까지 할머니는 손녀만이 걱정이셨다. 그 걱정이 할머니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인 듯 했다. 수술 전날인 오전까지도 자신 없어 하시던 분께서 오후 회진 시간에 들어오신 과장 선생님께 수술을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오후의 회진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할머니의 주치의가 들어와서 예정된 이튿날 아침 8시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는 전갈을 가져왔다. 그 말에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의 표정이 내 눈엔 복잡 미묘해보였다. 두려움이 크리라... 하지만 아직은 삶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오기와 싸우는 듯도 싶었다. 한 일(一)자로 굳어진 입가가 안쓰러웠다.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난 분명 착한 천사 표가 아니다.
절대 손해보고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못한다.
불의를 봐도 못 참고 욱하는 다혈질의 더러운 성질머리까지 지녔다.
그저 내 것으로 살면 되지...이렇듯 이기적이기도 하다.
이런 내가 경상도 할머니 앞에서는 왜 그리 너그러워지는 것인지...
병실에 있던 다른 분들까지도 내게 싹싹하다며 칭찬들을 해대셨다. 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지경이었다.
난 그저 70평생을 병원 한 번 다닌 적 없으셨다는 분께 처음 찾아온 병마가 그런 악질이었고 젊은 사람도 이겨내기 힘든 것이었으니... 분명 차원이 틀린 아픔이었겠지만 나 역시 무수히 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기에 할머님의 일이 남일 같지 않았을 뿐인데...
어쩌면 잠시나마 나를 키워주셨던 외할머니께서 젖먹이 때부터 당신 손으로 받아서 성인이 되도록 보살펴야 했던 외손자를(나와는 사촌간인 남동생)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내신 것을 곁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할머님의 70평생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맞춰져서 살아오신 것이 안쓰러워 생긴 연민 때문인지도...
그냥 마음이 자석처럼 끌렸다.
그런 마음이 할머님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게 만들었다. 작은 것이나마...
“할머니, 수진씨 핸드폰 있지요?”
“응.”
“번호 아세요?”
“응.”
“그럼 불러 보세요. 제 전화로 눌러 드릴게요.”
“아냐!”
“아이~ 불러 보시어요!!! 어서요~~”
“요금이 얼마나 비싼데...”
하긴 100원의 TV요금도 무서우신 분이시니 그런 반응 당연하시다.
칼자루를 뽑으면 썩은 무라도 자르고 마는 나의 성미는 당연히 질겼다. 그 성화에 못 이기고 할머니께서 끝내 번호를 불러 주셨다.
불러주신 번호를 누른 뒤, 할머니께 핸드폰을 드렸다.
“수진아~ 헬미다. 헬미 수술한다. 너는 걱정 말고 돈이나 열심히 벌어, 알았지? 끊자. 이거 앞에 언니 핸드폰이다.”
할머니께서 숨도 쉬지 않고 급한 몇 마디 말씀을 하시더니 핸드폰 폴더를 닫아 버렸다. 애써 눈물을 삼키시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 잘 썼어.”
“아휴...할머니 좀 더 쓰셔도 되는데...그게 뭐에요...”
“됐어. 이제 됐어. 목소리 들으니 힘 나. 웬만해서 핸드폰 빌려주지 않던데...새댁 고마워.”
할머니와 얘기 중 내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자를 보니 좀 전에 눌러드렸던 할머니의 손녀였다. 나는 좀체 아물지 않고 진물이 흐르는 탓에 다시 꿰매야 한다는 수술 자리도 생각하지 않고 할머니께 달려갔다.
그리고 할머니가 조금은 편안해진 모습으로 손녀와 대화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할머니는 수술시간에 맞춰서 소변 줄과 굵은 호수로 코를 통해 위까지 집어넣는 힘겨운 수술준비를 마치셨다. 코를 통해 들어간 호스가 고통스러운 듯 헛구역질과 함께 눈물을 흘리시며 힘겹게 앉아 계셨다. 그러기를 30여분...오한이라도 든 듯 몸을 떨고 계시던 할머닌 8시가 임박해서야 수술 침대로 몸을 옮기셨다.
“할머니, 잘하고 오세요.”
나를 비롯한 병실 식구들이 할머니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힘겨운 모습의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의 말에 대꾸도 못하시고 손을 흔들어 주시는 것으로 답례를 하셨다. 눈물이 핑...돌았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병실에 불이 켜지는 통에 나는 일찍 잠에서 깨야만 했다. 보조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지신 듯 일어나지 않는 할아버지를 지나서 할머니는 홀로 간호사들에게 불려 다니셨다.
나는 할머니께 알아낸 손녀의 번호로 문자를 날렸다.
<할머니께서 8시쯤 수술실로 들어가요. 그 안에 시간되면 전화 줘요. 할머니 바꿔줄게요.>
7시 반쯤 손녀에게 전화가 왔지만 할머니는 이미 코로 호수가 들어가 뒤라 힘겨운 상태셨다. 전화 통화는 물론 불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괜한 짓을 했나...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없이 내가 전화를 받았다.
곧, 할머니 말씀처럼 말이 조금은 어눌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수진씨죠? 할머니께서 수진씨 자랑이 대단하시던데... 그런데 어쩌지요? 지금 수술 들어가는 채비를 하시느라고 바쁘시네요.”
“그럼...통화 못해요?”
“지금은 그럴 것 같아요. 나중에 통화 할래요?”
“그럼... 몇 시에 나오는지 알아요?”
“글쎄...잘 모르겠네...”
“네... 나중에 전화 할게요.”
“그래요. 기운 잃지 말고 일해요.”
2시간의 할머니 수술예상 시간은 4시간이 지나고 5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내게 날아오는 수진씨의 문자는 잔뜩 애가 타고 있었다. 근무 중간 중간 문자를 보내는 듯 했다.
병실에 있던 할머니의 침대는 이미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다. 보통 3일은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에서 있어야 한다니 내가 할머니를 찾지 않는 이상 뵙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수진씨의 성화에 나는 간호사실로 가서 할머니의 상황을 두어 번이나 물어봤다. 그런 나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는지 간호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주 긴 얘기를 짧게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의 가족인 손녀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많이 애태우며 내게 할머니 안부를 물으니 알려 줘야 해서요.”라고 했다.
할머니는 완전한 6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수술을 마쳤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있던 병실은 11층, 할머니께서 계신 중환자실은 8층이었다.
분명,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올케란 분이 병실에서 짐을 챙길 적에 “수진씨가 많이 걱정을 하니 할머니 나오시거든 수진씨께 연락 좀 해주시겠어요?” 라는 말씀을 전해드렸다.
하지만 수진씨의 끊임없는 문자메시지로 보아 연락을 받지 못했음이 틀림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좀 체로 올라오지 않아서 나는 처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탈장된 부분에 혹이 있어서 절개를 했고 이곳저곳을 꿰맨 까다로운 수술 덕이었는지 수술 전보다 고통이 몇 배로 가중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의 일 앞에서 오지랖 넓게 나대는 나를 본다면 분명 남편이 잔소리를 해대고 말테니 그이가 도착하기 전에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니 두 번도 생각 않고 급히 계단을 내려갈 수밖에. 8층으로 내려가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남동생, 병실에서 뵈었던 올케란 분이 대기실 의자에서 마주하고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
할머니의 수술이 어떻게 됐느냐고 여쭈니 무사히 잘 끝냈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고 하셨다. 한시름 놓은 난, 애타하는 수진씨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곤 전화를 꼭 좀 해주십사 부탁(?)을 하니 병실에서와 같이 올케란 분이 알았다고 대답하셨다. 이제 됐겠지 하며 돌아서던 나는 왠지 미덥지 않아서 가던 길을 멈추고는,
“수진씨 전화번호는 아시죠?”
하고 여쭈었다. 올케 분이 할아버지께 나의 질문으로 되묻는다. 할아버지께서는 모른다고 하셨다. 할머님이 해주셨던 말씀처럼 분명, 저 할아버지께서 손자와 손녀를 찾아오신 분이 맞는 건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오지랖 넓은 나는...‘수진’이란 존재에 대해서 무신경한 분들께 볼펜과 종이 장을 구해서 전해 드렸다.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할 줄 모른다니...
내 형편도 남의 핸드폰을 뒤져가며 등록해줄 상황이 못 됐다. 수술 자리의 뻐근한 아픔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불러줬던 전화번호의 숫자까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돌아서는 나를 향해서 그 분들이 고맙다고 하셨지만...믿음이 가지 않았다.
수진씨의 존재는 할머니 한 분께만 소중한 것은 아니었을까...
병실로 돌아오니 남편이 와있었다. 화장실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던데 어딨다가 왔냐나... 거짓말쟁이인 나는...의사선생님 말씀이 조금씩 운동하라고 하셔서 복도를 한 바퀴 돌고 왔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자리에 누워버렸다.
이튿날, 아물지 않은 수술 자리를 다시 꿰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긴장했던 나였다.
간밤엔 잠들만 하면 내 아이들과 수진씨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와대는 통에 잠을 설치고 독한 약 기운이 합쳐진 탓에, 오전 회진 시간에 까맣게 몰려든 의사들의 등장에도 소독할 배 부분을 내 놓고 깜빡깜빡 잠에 빠져드는 대범(?)함을 보였다. 하지만...
“좀 아파요.”
라는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을 파고드는 무엇가의 고통 때문에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잠이 저만치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의사는 마취도 없이 무슨 종이 장에 스테이플 찍듯이 자리를 옮겨가며 나의 살점을 찍어대고 있었다.
의사들도 나만큼이나 거짓말쟁이들이 아닌가....
절대로 조금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대따 아팠으니까...
난 수술 자리를 꿰매고 고집스레 다음 날 퇴원을 했다. 가까운 병원에서 소독을 하겠으며 실밥 뽑을 때에 맞춰서 오겠다는 예약을 하고서...
아이들에게 엄마의 존재가 10일 이상 비워져 있었으니 얼마나 천덕꾸러기들이 되어있을까...걱정되어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퇴원을 했다.
수진씨에게 쇄도하는 문자에 이것이 마지막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는 수진씨가 열심히 사는 것을 보시면 힘을 얻으실 거예요. 나는 오늘 퇴원하구요.>
라고 답장을 했건만...
그래도 변함없이 수진씨는 할머니와 연락이 안돼서 미치겠다는 문자를 날렸다. 전화 통화도 몇 번 했지만 자신의 말을 내게 모두 전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한지 누군가에게 도움까지 요청하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
나의 국어 능력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백병원 전화번호를 알려줘도 이해를 못하고 계속 SOS를 청했다.
나... 이상하게 얽힌 인연이 조금은 귀찮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꾸만 밀려드는 책임감 때문에 직접 백병원 안내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알아낸 중환자실 번호. 할머니는 다행히도 3일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겨지셨단다.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 병실까지 알아내고 전화번호까지 따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수진씨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람마음 참으로 이상치...
너무한다 싶게 전화가 오더니 어느 순간 딱하고 연락이 끊어지니 내 쪽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진씨에게 문자를 날렸다.
할머니께선 많이 좋아지셨단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11월 10날인 오늘, 실밥을 뽑으러 다시 백병원으로 외래를 다녀왔다.
병원에서 볼 일이 모두 끝나고, 나는 남편에게 잠시 할머니께 다녀오마고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 왈,
“아픈 사람은 문병 가는 게 아니래” 라며 얼토당토 않는 말로 들이 되는 바람에 할머니를 뵙지 못하고 온 것이 여간 찜찜하지 않다.
어쨌든 지금도 나는 경상도 할머니의 모습과 일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져서 뇌리 속으로 헤엄쳐 다닌다.
병원에서 스쳐 지나가듯 잠시 만나 알게 된 할머니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
병원이 아니었으면 어마어마한 40만 인구 중 어디서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할머니...
나는 어마어마한 비율을 뚫고 그 분을 뵐 수 있었다.
커다랗고 특별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이 아프지 말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저는 이분들의 사연을 <인간극장>에 보내볼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할머님의 이야기가 보여진다면 분명 그분들께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방송사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물론이요, 할머니께서도 오해가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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