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지니 다시 만나지 않기 기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43

조각 모음(소주 한 잔)


BY 개망초꽃 2006-11-07

내 짝꿍은 애주가인데다가 분위기를 앞장서서 이끄는 활달하고 명랑하고 당찬 여자이다.


가끔씩 술 생각난다고 반 분위기를 술집으로 인도할 때가 자주 있는 편이다.

오늘도 그랬다.

날씨도 스산하고 마음도 늦가을처럼 고즈넉하다고, 이건 짝꿍 마음이 아니고 내 마음이지만…….

술 한 잔 하자는 말에 좋다고, 하면서 여럿이 모여 닭발 집으로 향했다.

사실 닭발은 먹어본적이 없지만,

다들 닭발 뜯고 싶다는 분위기인데 나 때문에 못 뜯게 될까봐

“그랴…….어디든 가자고.”했다.

다행이도 단골로 갔다던 닭발집이 내부수리중이라서

닭갈비집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물러가는 비라서 빗방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다.

둥그런 철판에 둥글게 앉았다.

지글지글 닭고기 익어가고 나는 소주를 한 잔 받았다.

다들 술집 분위기에 맞춰 웃고 떠드는데 나는 이런 자리에 앉으면 말수가 더 없어진다.

여럿이 떠드는데 끼어서 푼수처럼 아님 내 기분에 들떠 떠들면 좋겠는데

듣는 편이 훨씬 편하니…….

소주 한 잔을 나눠 마시며 나 나름대로 들어주고 웃는 것이 나는 편하다.

사람 모습이 다 다르듯이 성격들도 다 다르다.

이 곳에 모인 여자들은 혼자 산다.

아직 미혼인 경우도 있고, 이혼을 하거나 사별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자들이다.

상처 하나씩 껴안고 있어서 그런지 조용한 편이고, 웃는 것도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땐 너무 조용해서 기침을 하면 교실은 울림 판이 되어 크게 번졌다.


긴 파카를 입고 혼자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트에서 온 남자들이다.

명함을 돌리고, 켄커피를 하나씩 돌리며

\"놀러들 오세요. 잘해드릴게요. 맥주는 서비스입니다.\"

그들이 가고 우리끼리 이어서 떠들었다.

“남자가 스트립쇼 하는데, 아는데…….”  “그래?”

“그래....여자들 있는 자리에 와서 한바퀴씩 돌기도 해.”  “그래?”

그러나 누구도 나이트 가자고 하지 않는다.

혼자 사는 여자들이 더 편하게 놀며 즐기며 사는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남자에 관한 이야기나 음담패설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혼자 사는 여자들은 남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으니까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애인이 있다고 해도 조심스럽다.

왜냐면…….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자랑삼아 남편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혼자 사는 여자들은 애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밖엔 여전히 비가 차갑게 내린다.

우산이 없었다. 비를 맞아도 될 만큼 적당히 내려서 다행이다.

우리는 각자 집으로 향해 가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다리 긴 꽃순이가 껑충껑충 뛰며 반갑다고 난리다.

아들아이는 태권도를 갔나보다.

소파에 앉아 채널을 이리저리 누르며, 귤을 두 개 까먹고 있는데,

아들아이 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자마자

“엄마? 눈이 와요.” 한다.

“그래…….비가 눈이 되었구나.” 무덤덤하게 대답했더니

아이는 눈에 ‘ㄴ’자도 모르는 꽃순이 한테 눈 이야기를 해 준다.

“꽃순아? 눈 본적 없지? 올 해는 눈 속을 걸어보게 될 거야.”

그러고 있는데 딸아이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거기도 눈 와? 여기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어.

첫눈이 오는데 전화 걸 남자친구도 없고 해서 엄마한테 걸었어. 헤헤헤”

“하하하……. 잘했다.” 딸아이 덕분에 쓸쓸함이 덜어졌다.

“엄마? 11월초에도 눈이 내려? 올 해는 빠르다 엄청, 그치?”

“그러게…….소원 빌어라.

내년에는 남자친구 생겨서 첫눈 왔다고 서로 전화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

\'이건 첫눈이 아니야, 소복하게 쌓을 정도로 내려야 첫눈이라고 칠거야.\'


컴퓨터를 배울 날도 한달 정도 남았다.

앞으로 공부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자고 했다.

나도 술 못한다고 빼지 말고 소주 한 잔이라도 받아 마셔야겠다.

오늘은 쓸쓸하게 추운 날이었지만 쓸쓸한 이들과 소주 한잔을 기울였고,

딸아이의 전화 한 통으로 쓸쓸함이 덜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