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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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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모음 (시청앞 그 거리.1)


BY 개망초꽃 2006-10-23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을 보러 일산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시험 장소는 서울시청쪽에 있는 상공회의소였고,

삼성본관 앞에서 내리면 제일 가깝다고 했다.

다들 서울 지리를 몰라서 삼성본관이 어딘데? 한다.

내가 아니까 걱정 말고 따라오라고 했다.

처녀시절 직장을 삼성본관으로 다녔으니 내리는 곳쯤이야 어려울 게 없었다.


주변에 있는 빌딩들은 없어지고 새로 새워지고 해서 낯설었지만

삼성본관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회색에서 흰색에 가까운 건물, 내가 직장을 다닐때만해도 최고 수준의 건물이었다.

회전식 문, 유리처럼 매끄럽던 넓고 높은 로비, 양쪽으로 놓여 있던 엘리베이터,

휴지한 장 떨어져 있지 않던 화장실, 열리지 않던 정사각형 유리창,

들어가는 회사 입구에 고급스런 카펫.

삼성본관에 다니던 직원들은 그때 당시엔 최고 멋쟁이들이었고, 최고의 직장인들이었다.

왕십리 허름한 단칸방에 살고 있던 나는 맨 처음 그곳에 입사를 하고

한동안은 내 스타일에 맞지 않는 옷이라 불편했는데,

겨울엔 웃풍이 센 집보다는 웃풍없는 따스한 회사가 익숙하고 좋았다.


가을의 시청 앞은 한 잎의 가랑잎도 떠돌지 않는 깔끔한 거리였다.

삼성본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둥글고 커다란 화분엔

새빨간 크리스마스 나무가 강열하고 도시스럽게 심어져 있었다.

같이 간 일행이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카페오레, 에스카페…….커피 이름들이 어렵다.

뚜껑이 덮인 종이컵 커피를 한 잔 들고 시험 장소를 찾아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그때 그 시절엔 카페를 다방이라고 했다.

삼성본관으로 가는 도로와 서소문 사이 도로 일층에 널따란 다방이 있었다.

다방이름이 별빛이었나?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커피를 시키면 무조건 한가지였다.

나는 맥심커피를 좋아해서 회사에서 하루에 두 잔씩 꼬박꼬박 타 마셨다.

그때 당시에 다방에서도 팔았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탄맛나는 시꺼먼 커피에 프림과 설탕을 들이붓고

프림색 비닐 소파에 앉아 몇 시간씩 죽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그 곳에서 남자들도 많이 만났다.

많이 만났다고 해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 깊고 푸르게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고,

몇 번의 데이트정도였고

다방에 여자친구들과 죽치고 앉아 있으면 남자들이 쪽지를 보내곤 했었다.

마음에 든다고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든가 아니면 연락처를 적어주곤 했지만

한번도 그런 남자들과 합석을 하거나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삼성본관에 다닌다고 굉장히 도도했었고 건방지게 굴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대기업의 돈 많고 인간성 좋고

많이 배우고 멋스러운 남자와 데이트를 할 것 같았고

그런 부류의 남자와 결혼할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할까........

아무튼 엄청난 자아도취와 착각 속에 살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는 독하지 않았다. 상사의 꾸지람에 화장실로 달려가 울었고,

근무시간에 몰래 편지를 읽다가 눈물이 떨어져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했었다.

창 넓은 창에 흰눈이 날리면 턱괴고 한참씩 밖을 바라보면

앞에 앉은 직원이 미스 리? 눈 보면 생각나는 사람 있어? 했었다.

결혼 후 많은 사건 속에 걸그적거리다보니 독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는 덜 독해졌나보다.

아니 독해지고 독해졌었는데 독성이 빠져 나가고 있었나보다

지하 휴게실에서 목이 말라 음료수를 마시려 했는데 가슴이 떨려서 넘어가질 않았다.

반쯤 먹다가 탁자위에 놔두고 시험장소로 들어갔다.

 

책상마다 납작한 모니터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집에 있는 모니터도 센터에 있는 모니터도 두꺼운데, 역시 서울은 다르네, 했다.

내 번호를 찾아 앉았다.

모니터엔 내 사진과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떠 있었다.

어디선가 시험에 대한 지시사항과 주위사항을 일러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우스를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누군가가 마우스를 만졌나보다

“마우스 만지지 마세요!” 무섭게 야단을 친다.

‘아고~~ 어디에 눈이 달렸나보다.’

나는 천장과 벽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둘러보는 나한테 뭐라 소리칠까봐 더 이상 어딘가에 붙은 눈을 찾지 않고,

내 눈을 아래로 내려 모니터만 쳐다보았다.

두 손은 내 다리위에 올려져 있는데 컴퓨터는 알아서 움직인다.

모니터에 실험용 시험 문제지가 떴다.

문제의 답을 마우스로 누르면 답안지의 번호에 자동으로 까맣게 칠해진다.

‘편리하고 대단한 세상이다.

근데, 문제지를 손으로 잡고 연필로 체크해가며 시험을 보는 것이 나는 편한데…….’

연습용 문제지가 없어지고 진짜 문제지가 모니터에 확 뜬다.

처음 접하는 모니터 문제지가 낯설어 

마우스 잡은 손가락이 급성 수전증에 걸려 바들바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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