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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로 다시 돌아가고파.


BY 영영 2006-10-16


선 볼 당시 큰 건설회사의 현장 소장이라던 남편은 결혼 직후 바로 부도가 났다던가 뭔가 해서
한두달 거리로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던 중, 한국화약그룹의 태평양 건설에서 상무자리에 계셨던
사촌 시아주버님께서 이사람이 딱했는지 소공동에 있는 덕수궁 옆 당신회사의 건물내 전기관리자로
취직을 시켜 주셨다. 

알보고니 선 볼때  다닌다던 회사도 그당시에 새로 막 들어갔던 거였었다. 
남편이 맡은 일이란게 어쩐 이유인지 꾸준한게 아니고 한 현장을 관리하기 위해 급히 들어갔다 
금새 나오고 하는식이였던것 같다.

그러다 다행이 아주버님의 덕분에 취직을 해서 월급은 작아도 안정된 회사 생할을 하니 
그런대로 아뜰살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고 본성은 착하나 주사가 지나쳤던 남편은  잘만 다니면 따박따박 
월급이 나올 수 있는 그곳에서도 얼마 못 다니고 결국 짤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유는 밤 야간 근무시간에 술에 취해 자다가 불시에 순시를 도는 부사장 에게 걸렸는데, 
지금 뭐하는것이냐고 야단하는 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구하는것이 아니라 
눈을 부라리며 씨8 저8 하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데다가 외아들에다가 어머니나 누나들이 좀 낳게 사는 
인척이나  남에게 마치 자기들이 못사는걸 잘사는 사람의 책임이기라도 한 듯, 
무조껀 하고 갖는 적대감이나, 누구에게든 당하고는 안 참는다는 걸 보고 자란 때문인지, 
아니면 같은 핏줄이기에, 보고자란 어머니와 누나들의 성향을 알게모르게 닮은 때문인지
순수하고 착한 마음임에도 좀 잘난사람이 자신의 잘잘 못에 대하여 지적한다던가 하는 건
순리적으로 받아 드리지 못하는 습관이 강하게 뿌리 박혀 있는듯 했다.

하여 술을 먹다가도 자기편 누가 술집 주인이나 다른여성에게 추한 행동을 하였다던지
말도 안되게 상식에 어긋나는 실례를 범하여 시비가 붙더라도 무조껀 함께 달겨들어 
패싸움을 하곤 해서 자다가도 뻑하면 야밤에 파출소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자는 애들 
놓아두고 해결하러 친정오빠와 함께 뛰어 다녀야 했던 때이다.

그래도 술에 안 취했을땐 개척심이나 능력이 안됬을뿐이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된다는 
기본적인 마음은 가지고 있던  남편은 어느날 갑자기 도저히 안되겠으니 총각때 몇번이나 나가 
보람도 없이 고생만 했다던 중동엘 다시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같은 기술을 가지고도 
국내나 중동이나 비슷한 급료였슴에도 어쩔수 없이 해외길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중동으로 떠났고 나는 어머니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의 누가
살고 있는 집 행랑채에 딸린 단칸 방에서 네식구가 먹고자고 한방에서 어울려 생활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내가 옆집여자와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당신의 보약탕기를 마당에 패대기를 
치셨다던 바로 그 집이다.

근처에 맏시누형님이 살고 계셨고 그때에도 어머니는 아침만 드시면 딸내 집으로 가셔서
며느리의 흉을 보고 그러면 시누형님은 어머님께 들은 대로 동네방네로 올케의 흉을 보고 다니곤 했던 
때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그때가 참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아침이면 나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몸빼바지를 입고 뱀에 물릴까봐 장화를 신고 
앞에는 풀 물 묻은 앞치마를 두루고 어깨에는 망태기와 괭이를 짊어지고
산으로 산으로 약 뿌리를 캐기 위해 올라갔다.

약초라는게 얗은 산에선 볼 수 없기 때문에 점심 밥을 보자기에 싸 허리에 차고는 
산을 넘고 넘어 호랑이도 나올것 같은 깊은 산속을 헤메고 헤메며 산을 뒤지며 다니곤 해야했다.
한참을 눈을 크게 뜨고 여지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약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곳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럼 미친듯이 괭이로 땅을 파서 흙덩어리와 함께 딸려 나온 약뿌리를 탁탁 털어선 골라서
앞치마에 담고담고. 앞치마가 무거워서 걸어 다실수가 없을만큼 약뿌리가 가득차면 
바닥에 주저 안자 망태기에 옮겨 담고담고,, 다 저녁때 집에와 앞치마와 망태기에 가득찬 
도라지 같은 약뿌리를 개울가로 내려가 헹궈선 아궁이에 불을 때
부뚜막에 이삼일 저녁을 말리면 약뿌리는 수분이 하나도 안 남게 빠빴하게 마른다.

몇일씩 캐 바싹 말린 약뿌리가 모아지면 푸대에 담아서 또아리를 해 이고는 새벽같이 
첫 차를 타고 나가 시내에 있는 한의원으로 가 문을 두드린다.

자다말고 하품을 하고 나오는 약방 주인이 문을 열어주면
 
\"약뿌리 캐 왔는디 어떤가 보세유..\" 하면 주인은 푸대를 풀러선 뿌리를 꺼내 만져 보곤
\"음.. 좋은 놈으로 깨끗이 잘해 왔네,, 이거 얼마받으실라구?\" 하면
\"글쎄유. 금이 얼마나 될래나 저는 모르니께 달어 보시고 따져서 주세유..\" 하면
약방주인은 자루를 저울에 달아보곤 꽤 많은 돈을 턱턱 세서 건네 주시곤 했다.

그럼 나는 얼만지 세지도 않고 넝큼 받아서 몸빼 주머니에 넣고는 신이나서 시장으로 간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꼬마녀석들에게 줄 떡복기와 김밥을 사기 위해서이다.

김밥과 떡복기와 어머니가 드실 만두를 사 안고는 식을세라 부랴부랴 1시간 버스를 타고 
삼십분을 걸어서 집으로 오면
이미 떡복기는 팅팅 불어 있지만 어머닌 이런걸 쓸데없이 사왔냐고 돈 쓴다고 야단하시고 
아이들은 떡볶기가 맛이 있다고 먹곤 하던 그시절...

열흘에 한번꼴로 확성기에 지지직 거리는 쌍쌍파티 테이프를 시골마을에 울려 퍼지게 크게 틀어가며 
덜컹 거리는 트럭에 성냥과 쑤세미등 필수품과 요구르트와 과자 빵등 최저가 식품을들 싫고
고불탕 거리는 산골 마을로 팔러 들어왔던 일명 슈퍼차 가 오는 날이면
동네사람들이 누구네가 뭐 사나 하고 죽 구경 나오곤 하던 시절...

나는 몸빼바지에서 구겨진 천원짜리를 몇장 꺼내 요쿠르트와 빵을 사서 아이들에게 먹이곤 했다,

여편네가 돈 아까운줄 모르고  애들에게 야쿠르트나 사 먹인다고 손 큰 시누형님네 냉장고에는 
음료수다 뭐다 군것질 거리가 썩을만치 쟁여 놓으시고도 
며느리가 그러는건 속상하고 흉거리라고  이집저집으로  흉을 보고 다니시는 
어머니와 시누형님이 있기에 힘든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즐거웠던것 같다..


시누형님네서 고추를 딴다거나 남의밭으로 품을 팔러 가거나 약초을 캐러 가지 않는 날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장성거리로 어디로 나비도 보고 개구리도 보며 나무와 꽃잎을 보러 다니곤 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추억이 있고 낭만과 꿈이 함께 교차하던 내게는 가장 아름답던 그시절..
그때로 다시 돌아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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