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메모리라 불리며,
프로그램이나 운영체제, 문서 등을 불러와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주기억장치라고 한다. 주기억장치는 램과 롬으로 나누어지는데,
램은 전원이 꺼지면 기억된 내용이 사라지는 휘발성 메모리이다.
하루에 네 시간씩 앉아 공부를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나이 듦에 따른 기억장치의 손상이었다.
교실에 앉아 선생님이 설명해 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서 아~~하~그렇구나,
하지만 책을 덮고 교실 문을 나서면 주기억장치 램처럼 휘발성 메모리가 되었다.
선생님이 질문을 던지면 배웠던 기억은 휘발유처럼 공기 속으로 증발해 버려
언제 그런걸 가르쳐 주었나? 멍청하고 의아한 표정이 되어 선생님을 실망시키곤 했고,
처음 시험을 볼 때는 문제의 뜻을 이해 못 해 제 시간 안에 문제를 풀지 못했다.
40문제에서 24문제만 맞추면 되는데 확실히 알아서 푸는 문제는 4~5개뿐이었고,
열문제정도는 많이 듣던 말인데 아리송했고,
나머지 문제는 이 말을 하는 것인지 저 말을 씨부렁 떠드는 것인지
도대체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이러고도 내가 한국사람이고,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창피했고 한심해 보였다.
공부를 하고 시험지를 풀면서 바보 같은 년, 기억력이 손상 된 년,
넌 분명 기억을 해 주는 뇌가 상처를 받아 뇌세포가 파괴 되었나봐,
스스로 욕을 하고 스스로 나를 위로한답시고
신경을 많이 쓰게 한 이러저러한 생활고와 어떠저떠한 남자를 탓하기도 했다.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시험을 한달을 앞두고
하루에 네 시간씩 수업을 듣는 것만 가지고는 20문제이상 맞추기가 버거웠음을 알고
밤부터 새벽까지 하루에 세 시간씩 글을 썼던 시간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대하는 컴퓨터 용어와 구성과 운영체제와 기본상식은
같은 내용을 몇 번씩 반복해 읽어도 다음 장을 넘겨 같은 용어가 나와도
무슨 뜻인 줄 몰라 처음부터 다시 읽고 외워야 했다.
새폴더도 만들 줄 몰랐다.
세탁기 단추를 누르듯이 순서별로 아이콘을 더블클릭하고 인터넷으로 들어가
문학 방에서 글을 쓰고 글이나 읽었던 나는 컴맹이나 마찬가지였다.
커서가 껌뻑이면 감정을 키보드로 쳐서 입력하고
복사를 해서 붙이기만 했던 나는 컴이라는 생소한 나라에 와 있었다.
처음 가는 길을 어리바리하게 쫒아가다가 뒤돌아 다시 보면
이 길이 그 길 같아 옛일처럼 까마득하다.
뜻도 모르는 컴퓨터 용어만 잡히지 않는 구름이 되어 두둥실 둥실둥실 떠다녔다.
수없이 많이 갔던 경복궁이나 덕수궁을 새로 사귄 남자와 찾아가면
옛날에 어떤 남자랑 왔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때가 많다.
분명히 남자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닐던 길인데
그 남자가 성질머리 고약했던 남자였는지,
친구 이상 감정이 없다는 나를 맹목적으로 쫒아 다녔던 은행 다녔던 남자였는지,
나처럼 말이 없던 키가 커다란 남자였는지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여러 남자들이 머리위에 두리 두둥실 엉키듯이
책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헷갈리기만 했다.
나는 길치다. 기계치이기도 하다.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후문으로 나와도 길을 잃어버렸고,
우리 집까지 승용차를 타고 바래다주면 낮에는 알겠어서 가르쳐 줄 수 있는데,
밤에 가면 헷갈려서 몇 번이나 헤매다가 찾아간다.
기계만 보면 덜컥 겁부터 먹는다.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할 줄 몰라
수첩에 전화번호를 적어 전화를 걸때마다 수첩을 들고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러니 남의 핸드폰을 뒤져볼 생각조차 못한다.
마누라들이 남편 핸드폰을 뒤적여 바람피우는 걸 잡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는 못 잡을 것이다.
느낌으로 잡아내지…….
“너 요즘 뭐하니?” “ 으응…….컴퓨터 배워.”
“대단하다. 그 나이에 공부를 하다니......” “ 대단할 거 없어, 그냥 빼먹지 않고 다닐 뿐이야.”
“공부할 때가 좋은 거야, 학창시절이 제일 좋았잖아.” “아니, 학생 안하고 싶어.”
“엄마? 공부 잘하고 있어?” “잘하고 싶은데, 기억장치가 고장났나봐.”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 목소리를 하나도 안 놓치려고 애를 쓰지만
생각은 허공에 떠돌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선생님은 설명을 하고 다시 또 되풀이 하지만 이해를 못할 때가 있다.
열 번도 더 가르쳐준 줄 알면서도 질문을 하면 대답을 못한다.
시험을 보면 한단어만 꼬아도 문제와 답이 연결이 안 된다.
학생들에게 시험 잘 봤니? 하고 물어보면 네 시험지는 잘 봤어요,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듯이
내가 그 짝이다.
나이 들어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젊은이들이 열 번보면 외울 것을 오십 번을 봐야한다.
열흘 동안 새벽마다 공부를 했지만
시험을 보면 24개 이상 맞추지 못했다.
최소한 24개는 맞아야 합격인데......
정말 기억에 문제가 생겼나보다. 내 기억장치는 휘발성 메모리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