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보이는 저 두 봉우리를 넘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며 책자에 소개될 이름없는 산, 기자는 스틱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한다. 지도상에 그려져 있는 산이긴 하지만 제대로 이름도 못갖추고 있는 산을 찾아 제를 올려 주고 잡지에 소개해 주는 산행에 태백주재 기자를 따라 동참한 아주 오랜만의 산행이었 다.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 위험을 감수하며 떠나는 오지산행이고 긴 장마와 수해로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있었던 내게 반가운 산행이 아닐수 없었다. 이제 살인도 서슴치 않는 폭염이 지구를 달구고 있다. 대지 위에 잠시만 서 있어도 익어 버릴 것만 같은 더위가 장마밑 기승을 부린다. 당연히 여름을 채워야 할 땡볕더위지만 연일 계속 되는 뜨거움을 피하기 위해 피서객들은 이곳 동해안으로 몰려들었고 나는 더 위를 피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더위를 피하는 방법, 각자 다르겠지만 흠뻑 땀흘리며 오르는 산행이 나의 피서법이다.끈 적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은 내게 접근금지령을 내린다. 태백과 영월 그리고 정선이 만나는 깃점 1330m 만항재, 산들이 구름을 잔뜩 이고 있었 다. 구름모자 쓴 산 위로 잉크빛 파아란 하늘이 티끌하나 없이 맑다. 만항재 뒤로 난 길을 쭉 따라가 보니 옛광산길과 산으로 접어드는 갈래길이 보였다. 산들머리였다. 넘어야 할 두 봉우리... 대간길을 가다보면 크고작은 봉우리를 그보다 더 많이 넘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인적없 는 산속에서 지도와 산세를 어림짐작하여 헤쳐 나가는 기자의 꽁무니만이 그 두 봉우리 를 넘을 수 있는 우리의 끈이였다. 동자꽃 / 물레나물 노란물봉선 / 참 취 동자꽃 한무더기가 다섯장의 하트모양을 만들며 사랑나누기를 하고 있다. 주홍빛이 초록속에서 광채처럼 빛난다. 6월부터 야생화를 보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 가. 생태보존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대덕산에서 수십종의 꽃들과 눈마주침으로 욕망 을 끌어내리고 한달내내 한번 더 가보리라는 계획에 긴긴 장마는 방해를 하고 말았다. 꿩대신 닭이라 내딛은 산초입에 지천이 야생화여라. 동자꽃 노루오줌 긴산꼬리풀 둥근이질풀 솔나물 여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들이 가는 길을 막아선다. 8월이면 더욱 기세를 올릴 일월비비 추와 나리꽃종류들, 모싯대와 잔대 그리고 금마타리등 봄부터 서열을 매겨 쉴새없이 피 어대던 숲속의 야생화는 보아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뽐내는 마임으로 그 절정에 달해 있 었다. 조릿대 숲을 헤치며 보이지 않는 발밑을 미끄러질세라 빠질세라 조심하며 걸어나간다. 빽빽한 나무사이로 보이는 앞산이 또 하나의 목표지점인데 길을 찾지 못해 지도를 펼치 며 확인작업에 들어가고 쩔쩔매는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64세 동갑인 기자와 우리를 안내한 대장님 그리고 18년동안 앓아온 당뇨와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생각을 바꾸고 산을 타며 병을 이겨낸 우리의 59세 왕언니, 56세 51세 다섯명 모두가 나보다 연배가 많음에도 내안의 멍울은 가끔 산행을 힘들게 만들어 뒤처지게 한 다. 쉼호흡을 할때마다 느껴지는 먹먹함이 무언가 들어앉아 있어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 다. 산을 다니며 많은 병을 치료했다는 사례를 보고 들으면서도 하잘것 없는 마음의 병 은 왜 이리 치유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두어시간을 오르고 내리다 보니 하나의 봉우리에서 뱅뱅 돈 결과가 되어버렸다. 오지산 행을 하다 보면 이러한 일은 다반사, 멧돼지를 만나기도 하고 뜻밖의 횡재를 얻기도 한 단다. 길은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적당한 자릴 골라 배부터 채웠다. 여섯명이 어깨동무 를 하고 대여섯 발자국을 걸어갔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면 풀은 보기좋게 드러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고 기자는 말한다. 그럴듯한 자리에서 게눈 감추듯 점심을 해결했다. 숲속을 나와 빼꼼히 바깥세상을 구경하니 저 아래 굽이진 길이 뱀 기어가듯 그려져 있 다. 폐도로 남겨져 있는 옛 광산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대의 무연탄지대였다는데 드 문드문 그 흔적들이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시커먼 빛의 산골짜기에 쓸려 내려오는 돌덩이들은 오래전 광부들과 함께 삶의 고락을 누렸을터 이젠 모두 떠나고 간 간히 지나가는 새들과 바람만이 척박해진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둥근이질풀 / 여 로 겨우 찾은 능선따라 한참을 걸었다. 깊은 산중에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덫이 보여 그것 까지 철거하며 가다보니 더욱 시간은 지체된다. 오후 네시가 넘어서 두번째 봉우리 정상 을 밟았다. 보랏빛 노루오줌과 이질풀로 둘러싸여 환상의 꽃밭을 만들고 있었던 곳에서 약식 제를 올리고 이젠 마냥 내려가는 하산길로 접어든다. 힘들게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내리막 길이 있고 한없이 내려가다 보면 또한 오름길이 있 는 것이 산이다. 인생의 포물선을 그려주듯 산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가르쳐 준다.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않다는 것도 알려준다. 거기에서 난 또 희망을 얻고.... 멀게만 느껴졌던 폐광지역에 다다르니 시커먼 돌덩이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 난다. 쓸려내려가는 위험을 막기 위해 갱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고 골이 패어 흐르는 물줄기는 청정수처럼 맑기 그지없었다. 굽이굽이 닦여진 광산길따라 가다보니 산들머리에서 보았던 봉우리 두개가 너덧개로 보 인다. 보는 싯점에 따라 달리 보였던 산, 한 눈에 들어온 그 산속에서 하루를 쩔쩔매며 오 달지게 채웠다. 출발지 보였던 \'혜선사\'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오니 이 아니 반가울 수 가... 오후 6시 30분, 10시간 산행을 마치고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모자를 벗겨와 저들끼리 노 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