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참으로 많은 추억과 기억들을 만들었다.
의대생들이 닭을 키우던 닭장을 개조하여
중학교를 가지못하고 공장을 다니는
우리같은 아이들에게 밤이면 중학과정을 가르치던
닭장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그곳에서였고
(야학에 관한 이야기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므로 절충)
후일 정계에 입문하셔서 아웅산 버마사태로
고인이 되신 고 심상우님은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이셨다.
창립기념일이던 어느 해 그분이 강단에 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곤색 작업복을 입고 운동장에 정렬해있던 우리들에게
그러셨다.
\"어려운 사람의 앞에 서게되는 긴장의 순간에는
저 사람도 화장실에 앉아 큰 일을 볼 때에는
쭈그리고 앉아 항문에 힘을 주기위해
얼굴을 붉히고있을 때가 있음을 상기하라
그리하면 대함에 어려움이 없을것이라\" 는.
좌변기가 일반화되어있지않던 때
정면으로 바라보기에도 어렵던 회사에서 제일 높은분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손톱밑이 거무스럼한 우리들과 어울려 놀이를 즐기시던
훌륭한 어른을 만난 첫 기억.
(아 물론 그분의 또다른 면도 있었을 것이다.)
교직을 그만두신 후
한때 인쇄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필체를
물려받은 건 지
우리 형제들은 글자체가 참 좋다는 소릴 듣는데
굵고 거침없는, 난 거의 남자 필체를 가졌다.
그걸 이용하여
오빠가 있었던 아이와 짜고 그네 오빠를 가장하여
잘난체하는 다른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오빠가 어떠하다는 둥 바람을 잡으면
그와 연관된 이야기를 써보내곤 했다.
우리의 장난으로 확인되던 날 낙담해하던
그아이의 얼굴이 생생하다.
어디서 잘 살고있는지...철없던 날의 장난이니
그아이도 추억으로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아버지를 회상하면
기분좋을만큼 술에 취한 날 고복수님의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를 노래하시거나
어쩌다 동생을 무릎에 앉히시고 자장가를 불러주시던
음악적인 기질과
내가 사는 지역에서 소문난 춤꾼이던
우리집 미용사와 어울리며 배우게 된 사교춤을
남녀 스텝 모두 능숙하게 밟으신다는
어머니의 끼를 내리받은 건 지
(어머니와 캬바레에 대한 기억이 있다
열너덧 무렵일까 빨래감을 뒤집던 난
어머니의 주머니에 있던 캬바레 입장권을 보았다.
그런곳은 아주 좋지않은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후 늦은 시각 미장원 앞에 서서 한없이 울었었다
어머니에 대한 감시였을까...
그런 날 보며 아버지께선 왜 그곳에서 울고있느냐
다그치며 야단하셨지만 아버지가 아시면 안될것같아
말도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하며 애를 태우던 기억)
톰존스의 keep on runnning과 고고가 유행하던 어느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어봤더니 참 재미가 있었다.
그 지역에선 꽤 큰 회사여서
봄 가을 야유회 기회가 주어지고
그걸 기화로 노래 잘부르고 춤 잘 추는 아이로 소문이 나
많은 놀이자리에 불려다녔다.
얼마주고 춤 배웠냐 묻던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리듬에 어울리는 몸짓을 하면 되지 그걸 뭐하러 배우느냐
코웃음치던 기억이 난다.
처녀애들이 많다보니 성탄이나 송년을 이유로
혹은 군입대를 앞둔 오빠나 애인들 송별파티가 잦았는데
단짝친구랑이 단골손님이었다.
훗날 흑석동에 위치한 음악다방에서
보조디제이를 하게 된 것도
go go 음악과 친해지면서
라디오 심야방송의 별밤지기가 되어
자연스레 팝에 빠져듦이 원인이었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