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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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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꽉 찰 날


BY 미켈 2006-06-30

 

어디부터 무너트려야 하는 걸까

언제부턴가 쌓은 담은 너무 두터워서 말로 풀고 글로 풀어도 다 겉핥기식이 되었다.

기쁨과 슬픔이 맘속 깊이 전해지지 않고 굳어버린 표정처럼 단단한 껍질에 걸러졌다.

없는 결혼 생활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일이 안 풀릴 땐 큰 소리로 울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배꼽잡고 웃곤 했다.

‘그래, 아기자기 하게 살면 되는 거야....’

그런데 그, 너무 착하고 사람 좋은 그, 그의 직장생활이 흔들렸다. 회사가 힘들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몇 달 밀린 봉급도 못 받고 나오게 되었는데 그 후론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도 모아둔 돈 하나 없이 전세대출금 억지로 갚으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멀쩡하게 옷 입고 나가도 주머니엔 천 원짜리 한 두 장이 다일 때도 많았다. 누가 알랴 내 맘만 넉넉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한동안은 억지스럽게 버텼다.

아이 낳고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겼다. 주말에 한번 아이를 볼 때마다 어찌나 부쩍부쩍 크던지 커가는 모습을 다 지켜봐 주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그리고 도련님이 졸업을 하며 함께 살게 되었다. 2년 동안 직장을 얻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혼자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남편도 동생이 있으니 예전같이 살갑지 않았고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 인생이었다.

그 겨울 퇴근하고 집에 갈 시간이면 벌써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집 앞까지 터벅 터벅 걸어가면 언제나 창문 밖으로 빛이 새어나왔는데 그 빛이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한결같이 TV 앞에 앉아있던 도련님... 남편은 나름 일 해본다고 매일 늦었다.

오자마자 저녁상을 차려 도련님과 먹고 나면 또 TV 앞.

한번은 그 빛으로부터 도망쳤다. 문 앞에서 돌아서서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 보았다.

드라마 속에선 그리 낭만적이던 모습이 나에겐 너무 초라했고, 소주도 써서 혼잣말하길 “현실은 쓰구나..”그랬다.

밀린 세금, 밀린 보험금..., 밀린 종이조각들...

 

그래도 여전히 따뜻했던 그.

6년 동안 밤마다 내 발을 주물러 주며 씩~웃어주는 그.

신혼 때 선물 받은 발 맛사지용 나무가 다 닳을 때까지 매일 발을 주물러 주겠다는 그.

“내 발 주물러 주는 거 싫지 않아?”

“왜~ 나는 너무 좋은데~”

“그래도 귀찮고 짜증나고 그럴 때 있잖아.”

“아니 그런 적 없어.”

하며 하얗게 웃는 그.

하지만 애써 그 웃음을 보지 않으려 했다. 돈이 없으니 그런 따뜻함도 어떨 땐 밉고 원망스러웠다.

어느 날 저녁 소주 한잔으로 맘을 풀어보려고 마주했다.

“나 힘들어. 빨리 어떻게 좀 해봐.”

매일 하는 대화다.

“나만 믿어. 조금만 더 기다려봐.”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서글펐다.

그동안 쌓였던 울음이, 몇 년 동안은 맘대로 울 수 없었던 울음이 통곡이 됐다. 집이 떠내려가라 소리치고 가슴을 쳤다.

그도 미안하다며 함께 울었다. 그의 울음이 나의 굳어버린 맘을 다독여 주진 못했다. 당연한 듯 그래야 한다는 듯 그의 우는 모습을 받아들였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날이 시작되고 얼마 후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남들이 나보고 얼굴만 커졌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래 원래도 많이 말랐었는데 더 말랐다. 팔도 가늘어지고 얼굴도 헬쓱하다. 몸에 비해 얼굴이 어찌나 크던지...

“하하 그래 꼭 모여라 꿈동산 같아. 얼굴이랑 어깨랑 똑같잖아.”

맘속에서 눈물이 났다. ‘나쁜 년! 못된 년! 네가 뭐라고 제 맘만 챙기고.’속으로 내 자신에게 험하게 욕을 했다.

내 남편과 비뚤어진 나와 화해하기로 했다. 아니, 화해해야 한다.


아직은 거울 속의 내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두껍게 쳐 놓은 담장에 구멍 하나 뚫어 놓은 격이다.

하지만 매일 나에게 말한다.‘깨야 한다. 다시 걸어 나가야 한다. 담장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

언제인지 모르는 주머니 꽉 찰 날 기다리다 모든 걸 잃기 전에

빈 주머니로라도 거리로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