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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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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인터뷰하다.


BY 불토끼 2006-05-17

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다. 그 호기심이 사람이 아니라 돈이었으면 강남구 삼성동에 집 한 채는 샀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멀쩡하게 일하다가도 갑자기 국민학교 5학년때 짝궁, 왕표연탄집 추영재가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고3때 담임 백곰이 어떻게 지내는지, 대구 모 헬스클럽 원장님 요즘도 고돌이치러 자주 다니시는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비단 내가 아는 사람뿐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도 그렇다. 시장통에서 고무다라이에 시든 부추 한단과 고추 한무더기를 놓고 앉아 계시는 할머니를 봐도 그 개인사가 무척 궁금해져서 할머니와 소주 한꼬뿌 따라놓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보니 한국에 있을 땐 잡지사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고 글쓰는 일을 주욱 해왔었다. 그런데 요즘 나의 삶은 어떤가. 홀홀단신 독일로 건너와서 정서에 맞지도 않은 독일말로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해야하고 정서에 맞지도 않은 신문을 읽어야하며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남의 일에 끼고 찡기기를 좋아하는 내가 나랑 닮은 사람 하나 없는 남의 땅에서 술친구 하나 없이...  좀 껄쩍지근하다. 그리하여 나는 재미난 일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젊은 거지와 인터뷰를 하고말았다.

그 거지는 내가 자주 다니는 포르투갈 카페가 있는 전철 다리밑에 앉아 동냥을 하고 있었다. 허나 그의 행색은 거지라 볼 수 없을 만큼 멀끔하다보니 처음에는 사지육신 멀쩡한 쟤가 저기앉아 도대체 뭘하고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거지말이 나왔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지에 대한 선입관을 좀 나열해 보겠다.
 
1. 나이가 좀 들었다. 사실 젊고 건장하고 패기있는 거지를 본 적은 없는듯 하다.
2. 행색이 허름하다. 행색이 깨끗하면 거지라고 할 수 없다. 옷사고 얼굴 가꿀 돈 있으면 누가 거지하나.
3. 거처가 일정치 않고 늘 다니면서 동냥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다는 노  랠 들어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 계속되는 노숙에 몸이 삭아 나이보다 10년은 늙어보인다.

이 네가지가 성립되어야 거지라 할진데 거기서 본 거지는 이 네가지 조건에 전혀 맞지 않는 새로운 스타일의 거지였다. 일단 나이.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젊고 패기까지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건강해보였다. 금발에 175센티정도의 키, 행색도 그다지 허름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월마트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다. 거처? 늘 일정하다. 다리밑에 산게 1년이 넘었다고 한다. 재산도 꽤 된다. 우선 누런 세빠뜨 잡종 개 한마리, 메트리스, 배낭, 침낭, 그 주위를 장식하는 여러가지 장식품들(꽃과 꽃병, 숟가락, 포크 등을 꽂는 예쁜 컵, 개사진이 담긴 액자 등...) 취미생활을 하는 도구인 스케치북과 여러종류의 연필, 파스텔 등...

취미가 고급인 거지다. 난 그 카페를 드나든지 3개월정도 되었을때 그만 이 거지에 대한 인간적인 궁금증이 폭발하여 그와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가끔씩 지나다 보면 그와 얘기하고 있는 행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사람들도 다 그의 인생이 궁금해서였을까? 남의 일에 끼고 찡기기를 좋아하는 나처럼.

 
거지와 인터뷰 스케줄을 잡으려고 한 아침, 그가 마침 자리를 뜨고 없어 볼일을 보고난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스케줄도 잡지 않고 충동적으로 인터뷰를 제의했다.

\'그러지 뭐\'

반응이 뜨뜨미지근 하다.

나는 그의 거처인 전철 다리밑 매트리스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그와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소주 한꼬뿌에 돼지껍데기 구운 걸 앞에 놓고 시작했어야 됐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름은?      
 
-보리스.

-가족관계는?  

-하이델베르그에 엄마와 누나하나가 산다. 아빠는 이혼하셨는데 연락이 안닿은지 오래됐다.

-가족들의 삶은 어떤가? 내 말은 식구들이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산다던가...

-다 보통 가정을 꾸리고 산다. 누나는 두번 이혼해서 지금 흑인이랑 산다. 조카가 넷인데 다 각각... 좀 그렇다. 그게 비정상적인거라면 모르겠지만 다들 남들처럼 산다.

-언제부터 집나와서 살았나?

-고등학교 중퇴하면서 주기적으로 집을 나왔는데 마지막에는 아주 나와버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집에서 살기가 너무 답답해서. 독일에서만 산 것도 아니다. 독일은 밖에서 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우선 날씨가 춥고 비가 자주 와서. 그래서 스페인으로 가서 몇년 살았다. 거긴 날씨도 따뜻해서 겨울나기도 좋고 물가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는데 어느땐가 경찰들이 외국에서 온 떠돌이들을 국경밖 프랑스로 다 내ㅤㅉㅗㅈ아버렸다. 그 이후로 프랑스에서 주욱 살았다. 스페인에서 알게된 사람들이랑 우연히 프랑스를 떠돌다가 빈집을 발견하게 됐는데 ㅤㅉㅗㅈ겨나기 전까지 거기서 제법 오래 살았었다.

-영어는 어디에서 배웠나?

-다니면서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배웠다. 학교에서 배운건 아니다. 영어는 대화하기에 무리가 없고 불어와 스페인어도 프랑스에서 살면서 많이 배웠지만 꽤 많이 잊어버렸다. 그리고 독일어는 모국어이니 4개국어 하는 셈이다.

-집에서 보리스씨가 이러고 사는걸 알고있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사는게 별로 부끄럽지 않다. 남들은 구걸이라고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돈버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 돈달라고 한 적이 없다. 우리 식구한테 손벌린 적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 한테도 돈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그러고 보니 그의 거처에 거지들이 주로 써서 깡통에 붙여놓는 구절인 \'나 배고파요\'라는 종이쪼가리가 없다) 사람들이 봐서 주고 싶으면 주고 안주고 싶으면 안주면 된다. 나는 독일 시민이고 나라에서 나오는 실업기금 80만원씩 받으며 안락하게 집에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업기금 받으려고 시청에 찾아가서 사람들한테 구걸하기도 싫고 그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초리도 싫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지금 내 삶에 만족하기 때문에 내 삶이 여기서 변하는게 싫다.

-여기서 몇년 살았나? 경찰이나 공무원이 철거하라고 하지않나? 이러구 사는거 사실 불법일텐데.

-여기서 1년정도 살았다. 처음 몇달 살았을때 경찰이 와서 철거하라고 했다. 근데 내가 이 동네에 마당발이다. 아는 사람도 많고 돈주고 가는 사람도 많다. 그 사람들이 다 나를 위해 서명을 해줬다. (갑자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나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100명이 넘었던 걸로 안다. 그 이후로 여기서 아무 저지받지 않고 살게되었다.(사실 아는 사람이 많긴 많았다. 1분꼴로 한명씩 아는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의 인터뷰를 방해했다. 생각하는 찰나 터키분식점의 요리사가 물 한병을 건네주고 간다.



인터뷰 방해자가 너무 많다. 아무래도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겠다. 그러자고 하니 역시 뜨뜨미지근하게 대꾸한다. 그러자고. 나는 누룩맥주 한잔 시켜놓고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얼굴이 좀 불콰해졌고 보리스는 근무시간에(?) 술을 안마신다고 해서 카푸치노 한잔을 시켜놓고 홀짝거렸다.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근무시간엔 안마신다니 프로다!
그래서 돈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이렇게 하루종일 앉아있으면 하루에 얼마나 버나?

-대중없다. 내가 자리지키고 앉아있으면 자리에 없을때보다 훨씬 수입이 많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자리를 안떠나려고 한다. 겨울에는 여름보다 수입이 많고 특히 크리스마스랑 연말에 수입이 제일 많다. 한번은 한 할머니가 5만원권 지폐를 넣어주고 가신 적도 있다. 평소엔 많으면 3,4만원 적으면 2만원정도 된다.

-여기 앉아있다보면 사람들을 많이 만날텐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많다. 거리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거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근데 대부분 나는 그런 호의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안좋은 기억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한번은 남자 하나가 나한테 제의하길 자기 여자친구랑 헤어졌으니 집에 와서 살라고 했다. 때마침 너무 추워서 그 집에 들어가 서 살긴 살았는데... 처음엔 옷갈아 입으라고 자기 옷까지 주면서 잘해주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잔소리가 심해졌다. 물 꼭 잠그고 다녀라, 그릇은 먹은 직후 씻어놔라, 샤워타올은 쓰고난 후 꼭 어째라... 기분이 상해있는데 나갔다는 여자친구가 일주일인가 지난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 남자도 그 틈을 타서 나보고 나가라고 하더라. 그 이후에도 몇번 그런 제의를 받은 적이 있지만 사람들이 한순간에 동정심으로 나보고 들어와 살라고 하는걸 알기 때문에 이제는 왠만하면 그런 호의는 거절하는 편이다. 서로가 불편하다.

-이 일 이외에 돈벌이를 해본 적이 있나?

-직업을 가져본 적이 딱 한번 있다. 20대 초반에 실업기금 신청하려고 시청에 갔었는데 나보고 일하라고 일자리를 소개시켜줬다. 거기가 분식점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하루 일하고 더이상 못해서 나왔다. 그 이후로 시청에 실업기금 달라고 찾아간 적이 없다.

-여자친구는 있는가?

-돈 들어서 왠만하면 피한다.(웃음) 나는 게이다. 내가 이러고 있으니까 하룻밤 제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어렸을 땐 돈벌려고 응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 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그 친구가 가끔 용돈을 주기도 한다. 그외의 수입은 없다.

-길거리에서 생활하면서 게이가 된 것인가 아니면 그 전 부터 게이였나?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길거리에서 살지만 몸팔아 돈버는 남창은 절대 아니다. 내가 이러고 살아도 보시다 시피 술마시지 않는다. 얼굴을 보면 알겠지만 마약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에 중독되는 순간 나는 술과 마약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독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술마시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림그리기인데 내가 길거리에서 이것저것 보이는데로 그림그린 걸 좋아한다. 한번은 어떤 아저씨가 내 스케치북을 보더니 주기적으로 스케치북과 그림그릴 재료들을 갖다주신다. 잘 그리지는 않지만 그림그리는 것이 재미있다.

-나는 돈벌러 가야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자리에 있는거랑 없는거랑 수입이 많이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들은 모자에 든 내 돈을 훔쳐가기도 한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미안하지만 그럼 이만 가보겠다.

-짧은 시간이지만 새로운 형태의 삶을 접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대화에 응해줘서 고맙다. 그럼 돈 많이 벌고 건강하길 빌겠다.


보리스는 내가 그 후 한참동안  다리밑 그 자리를 지키고 살았었다. 그 이후에도 내가 그곳을 지날때면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호의를 베푸느라 그에게 방을 하나 제공했을지, 아니면 다시 날씨가 따뜻한 스페인으로 돌아갔을지 모르겠다. 보리스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형태의 거지를 보게되었다. 생계형 거지가 아닌 선택형 거지. 보리스는 사업이 망하고 집안이 박살나고 돈벌려고 발버둥치다 거지로 전락한 생계형 거지가 아니라 거지로서의 삶을 선택한 거지인 셈이다. 선택형 거지라니 참 인간적이다. 게다가 다리밑 자기의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100명의 서명을 받은 사람이나 서명한 100명의 사람이나 100개의 서명을 받았다고 거지를 거기에 살게해 준 경찰이나... 다들 참 인간적이다. 거지도 하나의 인생이다. 독일정부가 한 사람의 국민인 보리스가 거지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배려해 주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