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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렵을 다녀와서


BY 억새풀 2006-04-15

 

올 여름은 50여년을 살아오던 중 가장 짧았던 것 같다.

평년 강우량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비를 뿌린 날씨 탓인가, 찜통더위라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고 여름을 보낸 것 같다.

아니면 초여름부터 시작된 새로운 사업에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27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25년여를 나의 삶이 다른 삶들과 다르다고 느끼게 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동댕이치고, 전혀 창의력이나 성취감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영역으로 뛰어들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내 인생에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대 변신을 하고 난 지금, 인간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무의미 할 수도 있는 것일까 하면서,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다른 삶들과 비교하던 어리석음에도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무엇이든 나의 분야에서는 최고를 자랑하고 싶었던 그 욕망들도 돌이켜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지......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여름도 거의 계절의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을 8월 19일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언제나 그렇듯이 마치 동네 개구쟁이들처럼 뜰채니 어항이니, 투망 등을 챙겨 강원도로 천렵을 떠났다.

25년간 쌓아놓은 기술적 노하우를, 적어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국내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해 주는 것을 던져버리고 지금의 이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미친 놈” 이라고 놀라며 만류하던 그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을 떠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건만 그날의 여행은 바뀐 내 삶의 방식만큼이나 생소함이 깃들어 있었다.

 

며칠 전이던가 현장에서 한참 인테리어 마무리 공사를 지켜보던 중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 오늘 이 여행의 시발점이 되었다.

“야! 돈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난번에 취소했던 여행 이번 주말에 가기로 했으니까 군말하지 말고 같이 가자” 할 때 이미 나의 의사는 무시되고 기정사실화 된 일에 동참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정신없는 놈들 이렇게 펼쳐놓고 어딜 가노 다음 달 좀 선선해지면 가자”는 말에

“너 오대산 내린천 알지? 거기 가본 사람이 없어 천상 네가 안내 좀 해 줘야 가지 안 그러면 다른 데로 갈 수 밖에 없다”며 길 안내를 핑계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친구들의 억지 우정도 속으로는 고마웠다.

허긴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씩 다니는 친구들과의 여행길 안내는 언제나 내 몫이었으니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여행을 즐기는 나는 방방곡곡 안 가본 곳 없어 지도 한 장 없이도 다 찾아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고, 또 내가 아는 길을 안내하여 가는 재미도 쏠쏠하여 언제나 자청하던 일이 아니였던가... 약 10년 전 가을이 깊어갈 무렵, 저녁을 먹고는 불현듯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생각에 토요일 저녁 주말연속극을 열심히 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채근하여 차 트렁크에 약수통 몇 개를 싣고는 훌쩍 길을 떠나 처음 가본 곳이 바로 홍천 내린천이였었다.

 

토요일 아침 9시에 아직은 나의 체취가 묻어나는 사무실에서 친구들을 만나 기사가 딸린 승합차에 쌀이며 언제나 우리들 나들이 길에 빠져서는 안 될 민물장어구이를 비롯한 부식과 술 등을 싣고 기사를 포함한 일행 7명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감을 가득 안은 채 출발을 하였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아직은 여름이건만 마치 가을하늘과도 같이 높고 푸른 하늘이 차창을 활짝 열고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시게 한다.

양수리, 양평 방향으로 해서 홍천까지 간 후 창천으로 빠지는 국도 코스와 영동고속도로

속사까지 가서 오대산을 끼고 운두령을 넘는 코스 중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구동성 오대산 방향으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결국 무미건조한 고속도로 주행을 2시간여 달려 속사 IC에 도착한 것이 오전 11시 경이였다.

 

오는 동안 내내 괜히 코스는 물어가지고 양수리의 전원 같은 풍경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온 김에 월정사를 들려보자는 한 두 사람의 의견 제시도 있었으나 점심때를 놓치지 말자는 중론에 밀려 결국 창천까지 내쳐 가기로 정하고 보니 어느덧 차는 운두령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었다.

한때는 우리나라 국도의 고개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했던 해발 1000여 미터의 운두령을 넘어 내리막길을 약간만 내려가면 이쪽 계방산에서 흐르는 내린천을 만나게 된다. 오대산과 맞붙은 계방산은 표고높이가 오대산보다 높은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언제나 오대산의 명성에 밀려 산 이름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예전에 만난 내린천은 자연 그대로의 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 농수로 개발로 인해 곳곳에 인공둑이 만들어져 자연스러운 정취를 조금씩 잃어 가는 데에 약간은 실망도 했지만 예의 내린천 맑은 물은 아직도 그대로 인듯하여 반갑기 그지없었다.

운두령 정상에서 약 20분 간 내려오면 홍천군 창천면 창천 삼거리를 만나고, 여기서 양양 방향을 보고 우회전을 하면 내린천 발원지인 칡소폭포와 삼봉약수터 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창천읍에서 잠간 슈퍼에 들려 어항용 떡밥이니 과자부스러기들을 사다보니 가게 안에 커다란 검은 비닐포대에 담겨진, 밭에서 갓 따온 듯한 상추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한 무더기 팔라고 하니 주인아주머니가 퉁명스런 강원도 사투리로 “그건 가져가도 손질하기 귀찮고 이파리도 작은 거래요, 그래도 갖고 가실 거면 한 포대 그냥 가져가래요” 하며 선뜻 내 주는 게 아닌가.

워낙에 상추쌈을 좋아하는 내가 마다할 리 없어 냉큼 차에 주워 담고는, 15분 거리에 있는 칡소폭포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전에 눈여겨 봐 두었던 펜션을 향해 다시 달렸다.

 

가는 도중 오른쪽에 위치한 내린천을 봤는가 싶으면 어느새 왼쪽으로 물이 흐르고 강원도 산길을 그렇게 꼬불꼬불 달리고 있었다. 여기도 어제 비가 많이 내렸는지 불어난 강물의 유속이 상당히 빠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이 저렇게 불어 투망을 치기는 다 틀렸고 어항이나 담궈야 하는데 괜찮을런지 모르겠네”하며 모처럼의 천렵으로 버들치 튀김이나

민물매운탕에 기대를 잔뜩 안고 온 우리들은 내심 걱정을 아니 할 수 없었지만 \"안 되면 펜션에 짐 풀고 속초로 넘어가서 민물고기 대신에 바다 생선회로 때우면 된다\"는 나의 말에 “그래 간만에 동해바다도 볼 겸 일단 한번 어항이나 던져보고 안되면 속초로 넘어가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언제나 의견의 대립 없이 문제가 생기면 둥글둥글 넘어가는 나의 친구들은 그렇게 근심을 떨쳐버리고 다시 바깥 경치에 심취하여 목적지에 닿을 때 까지 자연의 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창천에서 약 15분 쯤 달리면 내린천을 건너는 큰 다리가 나오고 다리 건너기 직전 우회전 하면 내린천의 발원지인 칡소폭포와 삼봉약수터 가는 길이다.

조금 들어가니 이내 비포장도로를 만나고 길가 감자밭에서는 이른 감자를 수확하는 여인네들의 손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정네들끼리의 나들이에 미안함을 느낀 탓인지 잠시 차를 세워 감자 한 상자 가격을 물어보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집 떠나 혼자 생활하는 내가 편할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상자에 이만팔천원이라는 말에 올해 모든 농사가 흉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국도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펜션에 도착해서 주인을 찾으니 아무도 대답하는 이 없어 약 10분간 전화도 해 보고 마당에 주인 대신 반겨주는 강아지들과 놀며 계곡 쪽을 바라보니 이쁘고 아담한 이층 빨간 벽돌집이 보였다. 속으로 이런 동 떨어진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사시사철 내린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지낼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만 하였다.

 

여기서 약 7키로 정도 올라가면 내린천 발원지가 쓰인 기념비가 있고 중간에 삼봉약수로 가는 길이 있는데 삼봉약수는 이름 그대로 세군데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로 유명하며 그 세군데 약수가 각각 맛이 다르기로도 유명하다.

아주 강하게 톡 쏘는 맛이 있는가 하면 부드럽게 마실 수 있는 약수도 있어 각자의 취향에 맞춰 골라 마실 수 있는 조금은 특이한 약수터이다.

 

이곳 발원지에서 발원한 내린천은 100리길을 달려 인제까지 이르러서는 소양강과 합류하여 소양댐을 이루니 북한강의 남쪽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인제까지 100여리의 길은 거의 내린천을 끼고 달리게 되어있어 어지간한 관광책자에는 모두 소개가 될 정도로 유명한 “내린천 100리길”인 것이다. 10여분이 지나도록 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우리는 양양 방향으로 조금 더 가기로 하고 그 펜션에서 발길을 돌렸다.

 

약 10여분 달렸을까, 우측으로는 내린천이 흐르고 그 둑방 위에 멋진 통나무집이 마치 알프스 그림엽서에나 나옴직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경관도 좋고 펜션 자체도 깨끗하고 멋이 풍기는 터라 우리는 그곳에 여장을 풀기로 하였다.

경상도 말투의 주인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들어서니 방이 두개고 따로 평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집안 한켠에는 쪼개놓은 장작더미와 벽난로까지 있어, 마치 어느 깊은 산중 산장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취사시설도 훌륭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맘에 들었다.

보일러가 있는데도 따로 온돌이 있고 아궁이에는 커다란 가마솥 두개가 얹혀져 옛날의 정취도 느낄 수 있게 해놓았다.

 

모두들 시장기가 들어 언제나 그렇듯이 오사장이 밥을 준비하는 동안에 우리는 어항이니 투망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나가며 “오사장! 쏘가리 댓마리 잡아 올테니 매운탕 끓일 준비도 해놔라”하는 큰소리도 잊지 않고 외쳐대면서......

집에서 나와 물가로 가는 짧은 길이지만 주인 내외의 정성이 어린 듯 아담한 오솔길도 인상적이었다.

수 만년을 지나며 물살에 씻긴 크고 작은 바위들을 감돌며 콸콸 흐르는 물에 도시 생활에 찌든 심신이 다 상쾌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비가 그렇게 왔는데도 물은 별로 흐리지 않고 예의 내린천의 맑음을 자랑한다.

어항을 집어넣을 양으로 들어갔던 하군과 최군이 3분도 못 버티고 “아고~ 발 시려라”하며 밖으로 나오기에, 얼마나 찬가하고 나도 양말을 벗고는 물에 들어가 보았더니 금방 오장육부까지 서늘해져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살이나 약하면 그런대로 참고 어항을 놓겠건만 급한 물살에 어항 하나 놓기가 쉽지가 않은데다 발은 시려오고, 하나도 설치를 못하고 결국은 발이 빠지지 않는 물가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대충 설치 해 놓고 보니 \'이거 오늘은 피라미 한 마리 건지기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앞선다.

조금 상류 쪽을 보니 우리 중화기 담당자 송군이 반바지에 시린 발 동동거리며 어깨에는

투망을 메고 언제나 그렇듯이 조수 성군을 데리고 두리번두리번 던질 곳을 찾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역시 한두 번 던지고는 내용물 검사도 안 하고 물만 툭툭 터는 품새가 피라미새끼 한 마리 걸려들지 않는 모양이다.

 

1시간여를 급류와 씨름을 하던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 물가에서 나와 따사로운 햇살에 젖은 발들을 말리고 있었다.

식사준비가 끝났다는 오사장의 부름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린 배를 채우고자 집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평상엔 이미 밥상이 차려져 있고 한쪽에선 지글지글 장어가 익는 소리도 들려  더욱 더 식욕을 댕기게 만든다.

주인아주머니가 씻어 주었다는 상추 한 무더기에 밥 한 숟가락을 얹고, 채 익지도 않은 장어 한 점을 올려 입을 찢어져라 벌린 채로 억지로 쑤셔 넣으니 방금 전 물가에서의 실망감도 어느덧 사라지고 시끌벅적 장터를 무색케 한다.

식사를 하며 일행들은 아직도 천렵의 묘미를 잊지 못해, 더 상류 쪽으로 가면 아마 투망을 던질 만한 곳이 있을 거라며 차를 가지고 가다 몇군데 더 던져보고 그마저 안 된다면 양양을 거쳐 속초로 가서 회와 매운탕 거리를 사오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그날의 천렵은 몇 년간 물가를 찾아다니며 즐기던 우리에게는 쓰라린 추억만 남기고

속초를 다녀왔을 때는 이미 해도 저물고, 달도 없는 어두운 밤하늘을 수많은 별들이 수를 놓고 있었다.

큰방에서 고스톱을 치는 친구들에게 먼저 잔다고 말하고, 두 사람이 겨우 잘 수 있는 물가 쪽방에 누워 창문을 여니 하늘엔 이름도 모를 별자리들이 무수히 반짝이고, 눈을 감으면 창밖 내린천을 감돌아 휘몰아치는 물소리가, 밤새 자장가가 되어 나와 함께 벗을 삼자한다.


 ---PS--- <새벽 녘 샵에 들어온 손님 때문에 잠도 못자고 할 일없이 앉아 있다 보니 문득 그날 밤 물가 쪽방에서 홀로 잠들며 들었던 내린천 물소리가 생각나 한자 적어보았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 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잠든 고요 속에 바위를 넘나드는, 바위가 크면 적당히 감돌아 돌며 도도히 흐르는 그날 밤 그 물소리는 아마 평생을 못 잊을 겁니다.

이제 손님들 돌아가시니 저도 한숨 잘랍니다.

지금이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길 떠나보세요.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 가지마세요. 흔들리는 감정에 자칫 그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음미할 시간을 빼앗길 수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