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다섯 살, 두 아들놈은 붙었다 하면 싸운다.
엄마한테 동시에 야단맞을 때나 형제 마음이 하나가 되지, 그거 말고는 모든 점에서 둘은 경쟁이 붙는다. 그래도 조금 철이 든 큰애는 동생을 많이 봐 준다. 근데 작은애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사사건건 징징대며 엄마를 찾는다.
[엄마, 형아가 때렸어요.]
[엄마, 형아 밥 안 먹고 돌아다녀요.]
[엄마, 형아가 나랑 안 놀아줘요.]
[엄마, 형아가 장난감 안 줘요.]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와 엄마의 처분을 기대하는 작은애를 실망시킬 수 없어, 그냥 소리만 요란하게 큰애 야단을 쳐 준다.
그러면 큰애는 억울하니까 동생을 쥐어박는다. 난 누구 잘못이든 간에 형제들끼리 때리는 건 보기 싫어서 매를 들고 와 크게 혼을 낸다. 대개 큰애가 그 매를 차지한다. 엉덩이를 맞고 손 드는 벌까지 서는 큰애의 입이 쑥 튀어 나온다.
동생을 때리지 말라면서 정작 나는 매를 대고... 이런 모순이 늘 반복된다.
몇 번 억울한 꼴을 당해서인지 이제는 큰애가 먼저 달려온다.
울음을 터뜨린 동생보다 앞서 달려와, 왜 동생이 울게 됐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유는 다 고만고만하다.
그런데 누가 먼저 고하느냐에 따라 죄질이 달라 보인다. 내가 그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않은 이상, 먼저 와서 하소연하는 쪽이 덜 잘못한 것 같다. 둘의 잘못을 지적하고 적절하게 벌을 주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또 큰애가 대응하는 법이 달라졌다.
잽싸게 달려오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내 처분만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켜보는 걸 알면서도, 고자질하는 동생을 윽박지른다.
[엄마, 형아가 내 컵 만졌어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배 째라는 식이다. 그 말을 하는 큰애의 몸짓이 참 재미있다.
먼저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눈은 위아래로 굴리며 -나 한 번 보고 동생 한 번 보느라- [...어쨌다고]의 [고]를 길게 뺀다.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웠을까? 그 말이 재미있어 나도 써먹었다.
[엄마, 형아가 나랑 안 놀아줘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형이 하던 말을 엄마가 하니 작은애도 이상한가 보다. 그냥 돌아 간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안 놀아주면 혼자 놀면 되고, 안 놀아주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오로지 제가 해결할 문제인 것을, 나더러 뭐 어쩌라는 말인가?
나중에는 엄마와 아들이 경쟁하듯이 그 말을 남발했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어 한 건,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뻔뻔하고 능청맞고 발칙한 느낌들이 신선해서다. 제가 잘못해 놓고-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하며 되려 큰소리를 치는 큰애의 모습이 아직은 귀엽다.
하지만 귀엽다고 계속 해선 안 된다. 그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보라.
남의 집 앞에 주차를 해놓고, 항의하는 사람한테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쓰레기 분리 수거를 제대로 안 하는 여자한테 좀 잘 합시다 했는데, 댁이 뭔 상관이요? 한다면 말 꺼낸 쪽에선 어떤 심정이 될까?
그 말을 자꾸 하다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될까 봐 이제 쓰지 말자고 주의를 줬다. 내 말을 잘 들어서라기보다 이제 싫증날 때가 된 지라 아이 입에서 그 말은 쏙 들어가 버렸다.
한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지 싶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가지 열등감을 갖고 산다.
못 생겨서, 뚱뚱해서, 키가 작아서, 너무 말라서, 나이가 많아서, 돈이 없어서, 내 집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해서, 아이가 없어서, 대학을 안 나와서, 부모가 없어서, 성격이 안 좋아서, 등등 우리가 느끼는 열등감의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그 열등감을 이기는 방법으로 이 말을 써먹으면 효과가 클 것 같다.
[넌 어쩜 그렇게 못 생겼니?]라는 말에,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난 그래도 너처럼 쓸데 없이 남 걱정은 하지 않아.]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다.
두려움이 없으면 세상은 아름답다고 했다.
누구보다도 겁이 많고 자신이 없었던 나, 지금껏 어찌어찌 살았다. 그다지 비굴하게 산 기억은 없지만,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지도 못한 채, 항상 살얼음을 밟듯 살아왔다.
튀지 말고, 조용히, 별 탈 없이 살자는 게 내 인생관이 돼 버렸다. 어떻게 살든 그 방식을 두고 뭐라 할 건 못 되지만, 난 내 삶의 방식이 수동적이고 폐쇄적임을 잘 안다.
뭔가 변화를 주지 않으면 나머지 내 삶도 이 모양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너 아직도 집에서 노니?]
누군가 호들갑스레 걱정을 하면, 마치 내가 그 사람한테 밥이라도 얻어먹고 사는 것처럼 쭈뼛쭈뼛 움츠러들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앞으로 쭈욱 놀 생각이야.]
당당하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