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하고 신선한 대통령 우유.’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눈길을 끄는 광고를 발견했다. 세상에 누가 감히 우유에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확인을 해 보니 그건 ‘대통령 우유’가 아닌 ‘대관령 우유’였다. 처음엔 일시적인 착시현상이려니 하고 그냥 넘겨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막강한 군대’를 ‘막강한 순대’로‘, 초록 물고기’를 ‘초록 불고기’로 읽는 등 점점 혼동의 빈도가 잦아지자 비로소 이런 현상들이 돋보기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노화의 전주곡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몇 년의 세월이 더 흐른 후, 급기야 ‘영원한 사랑’이 ‘영원한 사탕’으로 탈바꿈을 해버리자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고 그 날로 돋보기를 맞추게 되었다. 노안이 오기 전까지는 시력이 좋은 편이라 일 년에 몇 번 선글라스를 쓰는 게 고작이어서 안경을 쓴 모습이 처음엔 무척이나 생경해보였다. 정년을 마치고 퇴임식을 기다리는 교장선생님처럼 근엄해 보이는 얼굴.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한낮의 햇살처럼 밝고 선명해서 먼지 한 점조차도 숨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낯선 손님과 친숙해지기 위해 한동안은 서먹하고 어두컴컴한 기분을 도닥이는 과정을 거쳐야했다.
안경을 사용한지도 그럭저럭 5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는 책이나 신문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안경을 찾게 되고 컴퓨터 책상이나 식탁, 화장대등에 다양한 안경들이 24 시간 대기 중이다. 안경을 쓰는 일은 번거롭긴 하지만 희미하고 답답한 시야를 금방 해결해 주기에 그로 인해 생기는 불편함 쯤이야 당연한 것으로 감수하며 지낸다.
그런데 며칠 전 신체의 다른 곳에 미세한 결함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건이 생겼다. 우리 집은 거실과 주방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주방 일을 하면서 TV를 켜 놓고 할 때가 많다. 그 날도 평소처럼 아침방송을 보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작은 아이가 방에서 튀어 나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방송 예고 나오네.”하고
모 프로덕션에서 보조 작가로 일하고 있는 딸은 자기가 참여한 드라마가 시작되자 부쩍 TV에 관심이 많아졌다. 화면을 보니 시그널 음악과 함께 드라마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난 왜 그걸 몰랐을까. 물론 TV를 등지고 일을 하다보면 못 들을 수도 있겠지만 멀리 있는 딸의 방까지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귀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그제야 나이가 들면 눈은 물론이고 귀, 목소리 그리고 신체 곳곳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그건 ‘대통령 우유’를 발견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단순한 노화가 아닌 노인의 대열에 당당하게 동참하는 그런 느낌.
내 나이 아직 오십대 중반이니 벌써 노인 운운 하는 것은 어쩌면 엄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은 더욱 충격적이다. 그 날은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는데 모임장소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아침부터 서둘러 두 시간만에 겨우 도착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속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늦는다는 전화 한 통조차 걸려오지 않았다. ‘혹시 모임 장소가 바뀐 건 아닐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총무를 맡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응. 나 지금 친구랑 산에 올라가고 있어.”
“그래? 그럼 우리 모임 오늘 아니니?”
“아니. 모임은 다음 주 월요일이지.”
그제야 허둥지둥 수첩을 꺼내 일정표를 확인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모임은 일주일 뒤로 잡혀 있었으니... 그렇지만 난 끝내 친구에게 그 날 내가 약속장소에 나갔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또 한 번의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한가. 금방 들었던 이야기도 깜빡깜빡 잊어버리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요즘엔 말하는 도중에 했던 이야기를 아예 통째로 잊어버려서 상대에게 되묻는 일까지 생겼다. 예전엔 굳이 수첩에 적을 필요도 없이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줄줄이 외워 전화를 걸었는데 요즘은 어쩌다 밖에서 집에 전화를 할 일이 생기면 집 전화번호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황당한 일도 생겼다.
이 모든 현상들이 단지 노화 때문일까.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지혜롭고 총명해지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흐트러짐을 경계하고 단속하는 사람들은 이토록 허술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신체적인 노화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건망증은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하다. 건망증은 복잡한 환경에서 지속적인 스트레스나 긴장감으로 뇌가 복잡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오래 지속될 때, 특정한 생각이나 사건에 집착할 때 또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가사노동으로 생기는 것이라 한다. 건망증을 예방하려면 메모하는 습관, 규칙적인 운동, 다양한 취미생활, 충분한 수면과 독서를 해야 한단다. 이제 단조롭고 안일한 일상에서 벗어나야겠다. 새로운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하는 일이야말로 나태해지고 느슨해지기 쉬운 노년을 활기차고 보람 있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려면 우선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야겠지. 근데 메모장이 어디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