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아이가 되어 버린 친정아버지께)
아버지! 푸름을 뽐내던 신록의 계절 봄도 어느덧 지나가버리고 이제 더운 여름이 다가왔네요. 이렇듯 급변하는 계절의 흐름처럼 우리네 세월들도 이렇듯 빨리 지나와 버렸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검디검은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하얗게 변하시고, 점점 어린 아이처럼 되어 버리신 아버지의 그 모습들이 떠올라 제 마음 한 구석을 시리게 만듭니다.
제가 철없는 꼬맹이였을 적, 아버지께서는 꼭 저희들 손을 잡으시고 포항 형산강 둑길을 쭉 산책하셨지요? 어린 나이에 많이 걷는다는 것이 그 당시 저에겐 참 힘든 일이었지만, 아버지랑 같이 손을 잡고 간간히 재밌는 동화도 듣고 아버지께서 사주신 소라 과자를 맛보던 일들에 참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주말에 어머니께서 안 계심, 보리차 물이 팔팔 끓으면 식은 밥 한 덩이를 말아 넣고 진간장과 계란을 넣은 그 아버지 표 밥이 오늘따라 많이 생각이 납니다. 맘 같아선 마냥 행복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 때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현재는 저에게 너무나 의욕 없고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리신 아버지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암울하고 고단한 현실 때문일까? 과거의 자상하시고 가정적이셨던 아버지께선, 이제는 술로서 남은 인생을 의지하시고 사시는 나약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사실 저에겐 이제껏 별 고생도 않고 행복한 나날들만 주어졌던 탓인지, 하느님께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라고 결혼 후 저에게 주어진 엄청난 시련들로 참으로 힘겨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힘겨운 갈등으로 인해 제 자신이 고갈되어 버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술에 찌들려 살아가시는 아버지의 삶의 애환들을 속 깊이 헤아리질 못했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술 드시고 꼬인 혀 발음으로 “보고 싶다.”라고 한밤중 전화로 울먹거리시는 아버지에게 (제 자신이 힘겨워 보듬어 드릴만 한 여유가 없는 탓인지), 부담스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술로 인해 자꾸 일을 만드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딸이자 인간으로써 딱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무리 속 깊은 조언을 해드려도 통 말을 안 들으시니 아버지에게 강한 실망감을 느껴서, 부녀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제 자식들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혈연은 무서운 법!’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어버리려 했지만, 자꾸 술로 인해 사흘이 멀다 하고 사고를 치시는 아버지의 소식들이 귀에 들려올 때마다 제 가슴 속엔 그런 아버지가 참으로 안쓰럽고, 일찍 시집가 버려 아버지께서 정말로 힘이 드실 때 옆에 있어 드리지 못함으로 인해 너무나 죄송스런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아버지!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사고만 치시는 아버지가 한때는 너무나 원망스러웠지만, 한번 왔다가 한 번 가는 우리네 인생 까짓것 열심히 긍정적 마음으로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세상엔 시력을 잃어 눈부신 햇살의 아름다움도 모르고, 또한 돈이 없어 차가운 겨울에도 냉방에서 잠을 자야만 하는 불쌍한 이들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나 저나 가족들 모두 사지육신이 멀쩡하여 좋은 곳 가보고 아름다운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엄동설한에 따스한 방안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축복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처한 현실이 외롭고 매우 힘드신 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고 술로 자신을 더욱 좌절시키시지 마시고 우리네 인생 함 힘차고 멋들어지게 살아봅시다. 그리고 부끄러워 직접 아버지 앞에서 부르기는 뭣하나, 이렇게 편지 상에서나마 이 노래 꼭 불러 드리고 싶네요.
“아빠! 힘내세요! 아진이가 있잖아요.”
(아버지를 그래도 무척 사랑하는 딸 아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