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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국밥집 이야기 (2)


BY hayoon1021 2005-04-19

그날은 내가 국밥집 일을 시작하고 다섯번 째 되는 날이었다.

식당일도 그날 하루의 흐름이란 게 있다.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는 일단 정신차릴 틈 없이 바쁘다. 자정이 넘어가면서는 한두 팀 정도의 손님만 남거나 뚝 끊어진다.

그러면 우리도 저녁을 먹고 뒷정리와 청소를 한다.

새벽 시간에는 2차 3차를 거친 술손님들이 마지막으로 온다.

그러고 나면 새벽 5시 이후 일찍 출근하는 손님들이 아침 해장을 하러 온다.

하지만 손님들은 그야말로 간간히 오기 때문에 눈꺼풀이 감기는 걸 빼면 밤일을 하는것도 할만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저녁 손님도 다른 날보다 훨씬 많았고, 자정이 넘어간 시각에도 두세명, 혹은 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손님이 꾸준히 왔다.  술손님들은 식사만 하는 손님보다 시간을 길게는 2시간까지도 끈다.

마침내 그들이 가고 아, 이제 좀 한가해지나 보다 할 쯤이면 다시 우루루 손님들이 들어왔다.

야간 담당은 홀 청소가 가장 큰 숙제다.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손님이 끊어지기만 기다렸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새벽 5시가 될 때까지 북적거렸다.

내 몸은 피곤해도 모처럼 매상이 오른다 싶어, 주방언니도 나도 처음에는 신이 나서 열심히 일했지만, 나중에는 출입문 열릴 때 울리는 종소리만 들려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심신이 젖은 솜처럼 되었을 무렵 야구모자 쓴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일행이 올테니 좀 기다립시다] 그랬다.

나는 그러시라고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컵 씻던 일을 마저 하려고 고무 장갑을 꼈다. 손님은 그 남자 말고도 두 팀이 더 있었다.

컵을 한두 개나 씻었을까, 뭔가 느낌이 이상해 돌아보니 방금 그 남자가 카운터에서 전화를 쓰고 있었다.

핸드폰이 보편화된 세상이다. 카운터 전화를 쓰는 손님은 거의 없다. 더구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전화를 쓰다니!

화가 난 것도 잠시 화살처럼 내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카운터에 있는 돈의 안전이었다. 

그 남자는 카운터 안쪽에 들어가 버젓이 전화를 쓰고 있었다. 내가 돌아본 그때 막 수화기를 드는 중이었다. 그 행동이 아직 돈에는 손을 안댔겠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나는 얼른 장갑을 벗으며 카운터로 갔다.

남자는 내가 가까이 다가와 지켜보는 것도 모른체 하고 큰소리로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용은, 시켜놓을 테니까 빨리 오라는 거였다. 전화를 끊고 남자는 바로 주문을 했다.

국밥 4그릇에 고기 주물럭까지 4인분. 사람들은 한번에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 않는다. 그 점이 의아했지만 바로 주방에 주문을 넣었다. 피곤함이 극에 달하면 신경이 분명 무뎌진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남녀 손님이 들어와 내 주의는 그리로 쏠렸고 혼자 있는 그 남자는 신경쓰지 않았다.

곧이어 다른 한 팀이 일어나기에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갔다.

그런데 돈통을 열자 만원권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오천원, 천원, 오백원 동전은 그대로 있는데 시퍼런 지폐만 사라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사태를 깨닫고 그 남자가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니, 물컵만이 덩그라니 놓여있고 남자는 이미 사라졌다.

그 순간 나를 내리쳤던 충격과 당혹감을 지금 이순간도 내 심장은 기억한다.

일단 아무 내색없이 손님들을 내보내고, 얼른 주방언니한테 달려가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로 돈이 없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목에서만 맴돌고 제대로 말이 되어 나와주지 않았다.

몇번의 확인 후 언니는 실장님한테 전화를 했고, 가까운 데 사는 그녀는 곧 달려와 주었다.

벽시계는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룻밤 몽롱한 꿈에서 막 깨어난 느낌이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냐고, 고맙게도 실장님은 그말부터 해주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손해본 금액을 대충 뽑았다. 평소 야간 매상의 두배인 40만원 정도였다. 카드 계산한 건 빼고 만원권 없어진 것만 그랬으니 그날은 정말 전례가 없는 호황이었다. 어떻게 그 남자는 절묘하게 이런 날을 골랐을까?

나는 아까 그 남자가 전화를 쓰고 있을 때, 바로 카운터를 확인해 보지 않은 걸 자책했다.

[소용없어요. 이미 작정하고 온 놈이니 여자 둘이서 어떻게 대항했어도 막을 도리는 없어요. 문 열고 뛰어 나가버리면 그만인데 뭐.]

그러면서 실장님은 야간에 카운터 관리나 안전 문제가 허술한게 사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금전적인 손해보다 충격받았을 내 마음을 더 배려해줬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으니 좋은 경험 한 셈 치라고...  실장님은 나보다 한살이 더 많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대범하다. 한 인간의 그릇은 나이로 판가름나는 게 아니라, 그동안 한 분야에서 꾸준히 다져온 실력과  다양한 경험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난 그녀한테서 배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대범하게 그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며칠을 앓았다. 몸도 마음도 마구 그 남자한테 유린당한 것 같았다.

그 일을 계기로 국밥집은 감시카메라도 달고 느슨했던 돈 관리도 철저히 하게 됐다.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남자가 돈을 가져간 이유가 집에 애기 분유가 떨어져서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