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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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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집 잘 온 여자??


BY 그린미 2005-02-10

가끔씩 생각해 보는 게 있다.

'나는 과연 시집을 잘 온걸까.............'

그 답은 나 자신 밖에 내릴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지만 지금껏 살면서 이게 정답이라고 명확하게 결론 내린 적은 없다.

다만 잘못 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잘 온 시집은 아니라고 암팡지게 못 박을땐 그럴만한 명분이 나를 흔들어 댈 때였다.

시집과의 갈등이나 남편하고의 언쟁이 있을때..등등.........

 

결혼을 하고 난 뒤 친정에 갔을때 였다.

알고 지내던 사람을 길에서 만났는데 느닷없이 묻는 질문에 뜨악했었다.

"연애결혼 할줄 알았는데 ...... 중매결혼 했다면서요?"

마치 잘못된 결혼이라도 한 양 의아해 했다.

"전 중매결혼 하면 안됩니까?"

"그게 아이고........다들 앤이 있다고 그러는 것 같아서요."

웃었다.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내 실상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면서 그네들이 내린 결론 또한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에 나를 집어 넣고 있었던 것 같았다.

 

민원창구에서 일 하다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아보는 손바닥 만한 동네에서 내가 설 자리는 바늘 꽂을 자리 만큼이나 좁았다.

어쩌다가 아는 사람하고 동네 다방에서 차 한잔 이라도 나눈 다음날에는 어김없는 낭설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었다.

호랑이 같은 아버님 귀에라도 들어갈세라 가슴 졸인적도 많았다.

소문만 무성했고 가슴 저린 연애 한번 변변이 못한 숙맥보고 연애결혼 운운 하는 사람을 보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공직에 싫증을 내고 결혼과 동시에 던져버린 사표에 일말의 후회도 없이 지낼줄 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발등을 찍고 싶었었다.

결혼만 하면 온통 장미빛이 나를 감쌀 줄 알았는데 결혼은 그야말로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부대끼고 찢기고 상처받고 그러면서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머리 들이밀고 살아야 하는 어찌 할수 없는 '현실인'이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다.

'여자는 항상 웃목에 도망 보따리 싸 놓고 산다'고 했다.

삶이 힘들때엔 항상 달아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막다른 각오가 배어 있는 말이었다.

 

시조모님이 밥상 부엌바닥으로 산산 조각내고 시퍼렇게 굴었을때 난 보따리를 챙길려고 했었다.

애써 손질한 빨래 맘에 안든다고 구정물에 쳐 박았을때도 난 도망을 생각했었다.

남편 멱살 거머쥐고 단추를 다 뜯어 놓았을때는 너무 무서웠다.

할머니의 서슬에 반기 한번 들지 못하셨던 효자 시아버님의 무능에 화가 났었다.

참다 못해 바른소리 쏟아낸 나에게 친정을 들먹였을땐 칼을 들이대고 싶었었다.

여든을 바라 보시는 연세지만 한글을 다 읽으셨던 그 어른이 내 일기장까지 뒤져서 읽어보았을 땐 죽고 싶었다.

 

연탄 불 갈러 오라는 시어머님의 새벽 전화를 받고 쫓아 갈때엔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다

허락 안 받고 비닐봉지 버렸다고 노발대발 하시던 시어머님에게 죽을 죄 지었다고 머리 조아렸을땐 난 내가 아니었으면 했다.

병마에 시달리시던 시어머님을 십여차례나 입원 시키면서도 난 웃어야 했던 광대였다.

어른은 버지기(커다란 질그릇)을 깨었어도 잘하셨다고 아부를 떨어야 했지만 난 옹가지(작은 질그릇)를 깨고도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이게 시집이라는 족쇄 였다는걸 피눈물로 겪어야 했다

숱한 원망으로 그 어른들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 했을땐 나도 나 자신이 무서웠다.

내 소중한 아이들에게 피와 살을 내려 준 조상이었다.

내 아이가 귀하면 그 어른들도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을땐 무릎 꿇고 빌어야 했다.

 

층층 시하의 엄격한 틀 속에서 내가 찾아서 숨쉴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집의 시선들은 한치의 뒤틀림도 용서치 않는 철저한 곰팡이의 온상이었다.

공기가 몽땅 빠져나간 진공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버틸수 있어던 건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내가 어긋나면 친정에 욕이 될것 같았다.

그에 따른 무성한 루머의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가..........시집을 잘못 가서 그렇고 그렇게 되었대..............'

입이 벌겋토록 떠벌리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은 오기였다.

 

또 다른 하나는 내 운명으로 인해서 내 아이들까지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 하나만 제자리 지켜주면 일상이  달라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때 강한 이성의 축이 고정되었다.

 

비교적 샤머니즘에 약한 사람일수록 후환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 例로 차를 바꾸면 거의가 고사를 지내고 개업을 해도 이 절차를 밟는다

혹시라도 뒷탈이 생길까봐 우려하는 맘에서 비롯 되었다고 본다.

 

살면서 혹시라도 탈이 생기면 내가 잘못해서 이러한가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실수나 잘못이 괜히 캥기고 후회도 따른다

그래서 두려운거다.

내 아이들 그리고 내 가정을 위해서라도 난 모든 걸 감수하고 웃어야 했다.

화나고 속상한 일부분으로 인해서 내 인생 전체를 내동댕이 치는 어리것음 만큼은 피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 도리 내 할일 빈틈없이 해놓고 내 귄리를 주장해야 된다는 생각은 항상 의무를 앞세우는 바람에 뒤로 밀리었지만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힘들고 숨이 막혀 올땐 이 결혼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편안하고 모든게 순조롭게 돌아갈때엔 '성공작'이라고 간사를 떨었다.

분명 성공과 실패는 극과 극을 이루었지만 생각의 차이는 바로 등을 대고 있었다.

기분에 따라서 수십번도 더 뒤집는 양면이 모두  내 안에 들어 있다는게 때론 소름이 돋도록 무서웠다.

 

결혼이 실패냐 성공이냐의 키는 남편이 쥐고 있다고 하면 억지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예전부터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는 게 반증된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바가지의 이름이 달라진다.

'금바가지' '은바가지' ' 아니면 '쪽박'...........

독립적인 개체를 남자에게 예속 시킨 속담이라는 비난을 면키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는거 속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남편이 별 하나면 아내는 별이 두개다.

남편이 정승이면 아내는 정일품의 정경부인 칭호를 받는다.

즉 , 남편의 위상이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딸려서 올라가는 게 아내들의 입지다.

그러나 아내의 위상이 올라갈수록 남편의 입지는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마거릿트 대처 수상이 그의 남편하고 외국 순방길에 올랐을때 부부동반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그랬다고 한다...' 대통령이 영부인 동반하는 건 왜 비난 안하냐고'.........)

 

남편들은 누구누구의 남편이라는 소리를 썩 달가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들은 누구누구의 아내라는 소리에도 만족해 한다.

물론 이말이 무리가 있을수도 있고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도 있을수 있지만 내 견해를 밝힌 것 뿐이다.

 

결혼이 성공이냐 실패냐의 기준을 富나 명예,지위, 학벌, 종교, 문벌,등에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아름다운 소시민들도 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니까 기준의 축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분에 따라 휘둘리고 있으니.....

 

명절 준비로 하루종일 분주를 떨었다.

일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할려고 자리에 누었더니 딸아이가 쪼르르 오더니 온몸을 주물렀다

"엄마,,,,,우리엄마...옛날에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에 숱한 고생하신거 다 알아요 "

"어떻게 기억하니?..네가 어렸는데...."

"엄마, 제가 초등학교때 일기장에 뭐라고 쓰였는지 아세요?"

"뭐라고 씌였는데?"

딸아이는 내눈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더니 씩 웃는다.

"고생한 우리엄마 내가 이담에 크면 꼭 호강 시켜 드릴려고 맹세했다.........고요...."

 

딸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딸아이가 내등을 토닥거렸다.

가슴속에선 장미빛이 뭉실뭉실 기어 오르는  것 같았다.

참고 기다린 시간이 오늘의 나를 이자리에 있게끔 만들어 주었던게 아닐까를 생각하니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난 분명 시집을 잘 온 것 같았다............지금 잠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