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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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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이야기


BY 다정 2004-12-21

저녁 여섯시가 되어도 밖이 훤하더니 어느날 부터는 다섯시가 되면 거실의 등을 밝힌다.

오후의 짧은 햇살이 길게 거드름을 피우며 거실의 반틈을 점령하고

그 찰나가 아까워 볕 쪼이는 꼬꼬처럼 등을 쪼이며 문득 바라본 달력에는

'동지'라고 아주 작게 쓰여져 있었다.

한 장 남은 달력에는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외딴 시골 길이 보이고

희미하게 산허리 아래에는  연기를 솔솔 피우는 초가집의 굴뚝도 보인다.

도시에서 태어나  이 곳에 뭐 그렇게 미련과 누구말처럼 뭐 먹을 것이 남았는지

아직까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나작하게 그려진 시골의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어느 돌담 길을 지나서

허리를 구부리고 마당을 쓸고 있을 아는 이가 있을 것 같아서

자꾸만 이리저리 자세히 쳐다 보곤 한다.

물론 오늘도 예외가 아니게 앉아서 보다가

얼굴을 위로 하고서는 누워서도 보며

그림 속의 굴뚝이 위치한 그 옆의 부엌에서 발을 분주하게 움직일 그 누군가의 시린 손을

못다한 그림속에서 찾고만 싶어서  눈을 껌벅거렸다.

 

유년 속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사방치기니 고무줄 놀이를 머리에 김이 나게 하다 보면 때를 놓치기가 일쑤였고

공터에서 내 땅을 넓혀 가고 있을라치면 언제 왔는지

엄마는 월남치마 앞자락을 펄럭이며 손등이 벌겋게 줄이 그여진 내 손을 홱

나꿔 채곤 했었다.

수북하게 담겨진 밥을 연신 입으로 넣으며

 "엄마, 언제가 동지고? 팥죽 묵고 싶다"

 볼이 미어지게 밥을 넣으며 뱃속에는 거렁뱅이가 들었는지 아이는

연신 또 다른 먹을 것을 찾았었고

엄마는  궁둥이를 툭툭 거리며 그랬었다.

 "낼 모레 아이가, 니 팥죽 그래 좋아해서 우짤라고 하노?'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동지'이니 팥죽을 끓일까 어떨까 물으니 아예 기겁을 한다.

죽 대신에 피자가 더 좋겠다고.

볕을 받으며 달력의 그림을 보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냉동실의 팥을 내어서 얼른 뜨거운 물로 한번 끓여 버리고

다시 물을 받아서 뚜껑은 살짝 얹어 두고 팥을 삶았다.

쌀도 몇 줌 씻어 두고

찹쌀 가루도 내어 두고

 몇 년 만에 해보는 데도 누가 옆에서 일러 주기라도 하듯이

그 다음은 뭐하지, 그래......뜨거운 물에 찹쌀 가루를 익반죽 해야지.

 

'동지' 아침은 참으로 부산스러웠었다.

엄마는 간밤에 씻어 물기를 뺀 찹쌀과 쌀을 커다란 양푼에 담아서 베 보자기 덮어 씌우고는

방학이라서 늦잠  잘려고 배를 깔고 누운 나를  발로 척 건드리며

머리에 얹어 달라고 하셨다.

연탄불이 알맞게 타올라 뜨끈하게 지펴진 아랫목에서

만화책 한 권 끄덕거리다 보면

쩌렁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맞춰 큰 언니가 월급 타서 사 드린 밤색 스웨터에

같은 색깔의 모직 바지를 입은 엄마가 바람을 한껏 뒤집어 쓰고서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향하고

뽀얀 분처럼 양푼에는 가루들이 가득하였다.

알루미늄  밥상위에 커다란 알루미늄  쟁반이 이층을 하고선

내 앞으로 자리를 하면

엄마의 끙하는 입소리에 맞춰서 찹쌀 반죽이 시작 되었다.

솜씨나게 한 손으로 서너개의 새알심을 빚어 내는 엄마와는 달리

작은 손으로 두개까지 욕심을 내다 보면 어느새 새알심은 일그러지기가 예사였고

몰래 하나씩 집어 먹던 새알심이  뱃속에서 끄르륵 소리를 내기도 했었다.

연탄 아궁이의 불을 아버지의 구멍난 양말로 조절을 해가며

집에서 제일 큰 솥을 휘휘 저으며

엄마는 그랬었다.

 "이 팥죽 니가 다 무라, 니가 맹근 새알심도 마이 묵고...."

 

"엄마, 팥죽 끓였어?..... 에이, 난 별로인데..."

거실에 가득한 죽 냄새에 교복을 벗으며 아이가 투덜거린다.

몇 알 되지도 않은 새알심을 작은 범랑 냄비에 넣으며

 눌러 붙지도 않은 바닥을  연신 저으며 자꾸만 귀를 귀울인다.

 

" 이거 얼렁 5호 집에 가따 주그라"

5호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다.

가기 싫다고 하고 싶은데

가고 싶기도 하고

어정쩡하게 팥죽 그릇을 들고서 삐죽이 나온 내복을 접으며 거울을 슬쩍 들여다 보고는

어기적거리며 그 집으로 가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줌마를 불렀었지.

열어 둔 방에서는 그 남자애는 뭐가 그리 좋은 키득거렸고

추운 날씨에 볼이 발갛게 익은 계집 아이는

냄비도 잊은 채 냅다 집으로 달려 갔었지.

 

딸 아이 몫으로 반도 채 안 되게 한 그릇 담고

또 다른 그릇에는 보란 듯이 새알심도 넉넉하게 담아서

 식탁으로 다가서니

아이가  물끄러미 그런다.

" 엄마, 울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