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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불혹의 빈털털이


BY 한길 2004-12-20

동경(東京)으로 온 것은 책임회피였을까?
끊임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아내도 나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였다.
하던 사업이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우리부부의 불행을 시작되었었다.


지방 대학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던 아내가 빚 독촉전화로 그만두게 되고, 나는 하던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2002년 봄. 잘 살아 보겠다고 4년여 주말부부 생활을 하던 것이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정말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내는 울고불고 난리고, 난 사업부도여파로 밀어닥치는 부채정리에 정말 정신이 없었다. 쥐꼬리만한 아내 퇴직금까지 모두 부채 갚는데 쓰고, 어렵게 장만했던 집도 경매로 넘어가고, 말 그대로 빈털털이로 아내와 난 쫓겨났다.
아내는 하루가 멀다하고 당신 때문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냐며 눈물로 보냈다.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다독거리며 위로 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부채로 인한 신용불량자가 되어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지만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인생을 포기해야하나 별의별 잡념에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길 2년여......

결혼 후 우리부부에게 최대의 고비였다. 이혼을 하니하미 하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싸웠다. 잘한 것도 없는 나였지만 그때는 왜 그리도 아내를 괴롭혔는지 후회가 되었다. 매스컴에서도 신용불량으로 인한 가정파탄, 이혼 등 어두운 뉴스가 심심찮게 나왔다. 우리 부부에게도 이런 상황이 닥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사실, 위자료가 없었기에 이혼 못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심각했었다.
돈 아쉬운 줄 모르는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자란 아내에게 있어 돈으로 인한 불행은 정말 표현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학조차 등록금이 없어 포기해야했던 나로서는 이미 시련에 익숙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어렵게 결혼을 해서 둘만의 행복을 지켜오던 상황에서 터진 시련인지라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도 사실이다.


여자는 역시 강한 존재인가.
아내는 개인병원에 취직을 해서 2004년 현재 만2년이 되어간다. 물론 대학병원 다닐 때와 월급을 비교하면 삼분의 일 수준이지만 아내는 악착같이 하루도 결근 없이 다녔다. 문제는 나였다. 막일이라도 해야 당연하겠지만 정말 일자리가 없었다. 겨우 공단의 근로자로 취직을 했지만 그 곳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부채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아내의 월급과 내가 받는 월급이 고작해야 예전 아내가 받던 월급만도 못하니 생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 아이까지 있었다면 어쨌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어찌되었건 방세 38만원을 빼고(월세가 비싼 것은 보증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드뱅크 아내의 것과 내 것을 합친 약35만원을 빼고, 기타 이런저런 잡비를 제하고 나면 제2금융권의 부채는 값을 길이 없었다. 감면해준다고 해서 몇군데는 갚기도 했지만, 그나마 저당설정한 부채는 몇천만원이 그대로 남은 상태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정말 강해지나보다. 사업을 접고, 여기저기 은행과 비금융권에서 추심을 해 올 때에는 죽고 싶은 심정였지만 2년여 되다보니 대처능력도 생기고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빨리 방황을 접고 일을 조금만 더 일찍 했더라도 자잘한 부채는 다 갚았겠지만, 1년 넘게 자포자기 상태로 방황했기에 부채를 갚아가던 것은 모두 아내의 몫이였다. 아내의 그런 헌신적인 모습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그래서 부랴부랴 직장을 구해 공장일이라도 했었는 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잘 다니던 직장이 점점 어려워지고, 월급이 자꾸 늦어지는 가 하더니, 회사가 어려워서 직원감축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출퇴근을 어렵게 중고차까지 마련했더니......
과장으로 근무했던 내가 월급이 제일 많다(?)는 이유로 정리 일순위가 되어버렸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 수 있는가.
많지도 않은 월급였지만 조금씩 모아가며 부채 갚을 날 만을 손꼽았었는데 이제 그 작은 계획마저도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사업할 때 받아 두었던 일본비자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 어차피 한국에서는 내나이쯤 되면 직장 구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 기능공으로 취직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일본으로 가서 돈을 벌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직장을 그만두고 열흘정도 빈둥대며 있었으니 아내도 말은 안했어도 무척 답답했을 터였다.
다행히 일본유학 경험도 있고, 일본어는 유창한 편이라 일본에 가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아내를 설득했던 것이다.
"아이도 없고, 그리고 일본에 간다고 꼭 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젊은 청년들도 취업이 안되어 빈둥대고 있는 한국 실정에 나이 마흔의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곳은 정말 없었다. 겨우 있다고 해도 터무니 없는 월급에 부채를 갚아 나간다는 것은......

12월 13일 일본 동경에 도착했다.
추심전화에 시달릴(사실 아내쪽의 부채는 거의 갚은 상태지만, 제2금융권 한 곳이 남아 있기에...) 아내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잡아 돈을 벌고 싶었지만, 일주일이 된 지금까지 특별하게 일을 정하지 못했다. 일본도 장기불황으로 경기가 안좋기는 마찬가지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 취업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나이가 30대 초반만 되었어도 괜찮겠지만 만 30대 후반인 나로서는 정말 답답하기만 했다.
3개월 체류자격으로 입국을 했지만 직장이 잡히면 불법체류라도 할 생각이다.
아내에게는 다음주부터 일을 시작한다고 했지만 사실 잡지 못한 상태다.

나이 마흔에 겪는 시련이 이리도 무거울 줄은 몰랐다. 하지만 늘 옆에서 응원을 아낌 없이 보내주는 아내가 있기에 나약했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를 믿어주고 나에게 희망을 품고 사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자포자기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견딜만 큼의 시련만을 주신다 하지 않았던가.
자업자득이기에 누구에게도 하소연 못하고 끙끙 앓았을 때 아내는 묵묵히 용돈을 챙겨주고,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 미소로 품어주지 않았던가.
한 때 노숙자로 숨어도 볼까 했지만 이렇게 마음을 잡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내의 덕기고, 아내의 사랑의 힘이다.

그렇잖아도 작은 체구의 아내에게 시련의 짐을 떠맡기고 일본으로 도망친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아내도 나름대로 단련이 된 것일까. 눈물 많고 여리기만 한 아내였지만 가끔 전화를 하면 씩씩한 목소리로 "자기 힘내!!" 하며 밝은 목소리로 받아 준다.
두고 온 자가용 운전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며 운전을 했다는 사실에 흥분된 목소리다. 아내는 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전혀 안했었다. 운전하는 것이 무섭다나...
오랫만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했단다.

이제 시작이다.
피해갈 수 없는 시련이라면 담담히 이고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멀리 타국땅까지 오게 되었지만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가벼운 출근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