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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역에서


BY 플라타너스 2004-11-20

얼마 만인지 그새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그래도 추워서 어깨를 움츠리는 계절이다. 겨울이 있으므로 하여 봄이 그 만큼 더 소중한 것, 이 겨울을 달게 정말 달게 살고 싶다. 지난 겨울보다 그래도 더 성숙된 거 아닌가(후후)

 정신없이 가을을 보냈다. 그리움도 잊고 만남도 잊고 왜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잊고 정말이지 바쁘게 여유없이 보냈다. 그리고 나니 겨울이다. 그래, 길 가생이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보고 '아, 가을이지' 했고 하나 씩 코스모스가 빛을 잃어가고 그 사이를 억새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출렁거렸다. 그래서 그 들판에 군집한 억새들을 보고 가을이 깊었구나 하였고 플라타너스 그 큰 잎들이 파삭하게 몸이 말라 거리 모퉁이모퉁이 마다 내 발길에 채이면서 '겨울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씩 더 나이를 보탠다. 그러다 가끔 가끔 거울을 보며 생각해 낸다. 내가 어디 쯤 있는 거냐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거냐구, 그러다가 또 생각한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값있는 일을 했구나 추억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다 또 잊고 흐르는 물살에 밀려 간이역을 지나듯 그렇게 무심히 시간들을 어쩌면 오래오래 기억하고 추억해야 할 소중한 한 점이었을 삶의 순간들을 그렇게 의미없이 잃어버리고 있는 거는 아닌지.

 기도를 하지 못하는 신앙인처럼 의식없이 살고 있는 동물같은 인간으로 추락하기 전에 나의 잃어버린 신앙을 찾기위해 나는 무엇을 기억해내야 하나? 나이 마흔의 첫 단추를 이렇게 허술하게 보내도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아침의 시간이면 나는 더 많이 외로와 지고 더 많이 추워서 몸을 움츠리게 된다.

  그런 아침이면 더 많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볼에 내 볼을 부비면서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본다. 금방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어 즐겁다. 그리고 살고 싶어진다. 근사하게 살고 싶다. 마음이 가을 밤송이처럼 헤 벌어져  믿음이 내동댕이 쳐져 만신창처럼 밟혀서 자지러 질 지라도 그 순간은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즐거워진다. 그리고 용서못할 사람이 없다. 너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싶어진다. 아니, 너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 순간만은. 무엇이 진실인지 몰라도 너란 존재가 진실로 다가온다.

 그래서 아이들은 새싹같은 아이들은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힘이다. 원동력이다. 그래서 다 고맙다. 티 없이 맑고 고운 아이들, 그도 한 때는 한 어머니의 순한 아이였겠지. 꿈이었겠지. 어머니를 살린 샘물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래서 다시 한 번 나는 순해진다. 내 아이를 보면서.

 이 곳은 구미역이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출구를 향해 무리지어 나가고 그리고 다시 그 출구를 지나 밀물처럼 들어온다. 역은 출발점이면서 또 끝점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누군가를 떠나보내면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다 잠시 역사의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때론 허기를 달래기위해 한 그릇의 우동을 기다린다. 그리고 떠나간다. 생의 한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