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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처럼


BY 동해바다 2004-10-09



    고운 가을배경 담아 온 내가 발갛게 물들어 있다.

    흘러온 세월 거슬러 올라가는 열차를 타고 23년 전 내장산의 붉은 단풍과 
    순수함 그리고 우정을 불사르던 그 시절 추억여행은 칙칙폭폭 잘도 달린다 . 
    산이 불타던 현장 속에 나도 함께 타고 있었던 날들, 울긋불긋한 낙엽들을 
    주워 와 오랫동안 책갈피에 보관하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지 속에 낙엽 
    한 장 붙여 우정 그리고 사랑 이라는 팬 글씨로 낙엽에게 사정없이 고문했던 
    순수의 나이가 그리워지는 날들이다. 

    산은 그렇게 과거로의 여행을 불러오는데 서슴치 않는다. 

    설악의 품으로 들어간 시월 엿새날..  
    만산홍엽을 바라고 떠난 산행이 조금 이르긴 했지만 설악의 단풍은 기대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9월의 기온과 날씨에 의해 단풍은 시작과 색깔이 결정된다고 한다.
    올해에는 일조량이 크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상으로 
    수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구불구불한 미시령 고갯길 메스꺼움 속에도 버스 창밖의 빨간 단풍은 마치 
    농익은 사랑놀음하다 들킨 새악시의 볼처럼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며 수
    려한 장관을 표출하고 있었다.
    짖궂게도 여행객들은 숨고 싶어도 숨지 못해 얼굴들지 못하는 새악시를
    악의없는 손가락질로 설상가상 더욱 발갛게 만들고 있다.

    설악의 한 귀퉁이라 할수 있는 12선녀탕과 대승령, 장수대 코스...
    남교리에서 출발하여 대승령까지 오르는 4시간 반동안 별 무리없이 발걸음이
    가벼웠던 산행은 그야말로 산다운 산을 오른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온
    감각기관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는 최고의 산행이였다.

    끊임없이 들리는 물소리와 잎새들의 부딪침이 내게 들려주는 바람의 소리..
    이미 탈색되어 폭신한 양탄자가 되어준 낙엽들의 재잘거림..
    간간히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그야말로 설악만이 만들어 주는 환상의 
    콤비가 아니였을까...
    
    습지에서 볼수 있는 이름모를 식물이 많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물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돌과 나무에 붙어 공생하던 이끼종류도 수없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험하다고 한다.
    험한 만큼 지루함이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던 설악산...
    꼭 20년전에 밟아보고는 처음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대승령까지 올라가는 12개의 선녀탕은 초록빛의 짙푸른 소를 만들어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유혹의 손길을 뻗으며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크고 작은 자연의 경이를 보고 어찌 놀라지 않을수 있을까..


    누천년 쉬임없이 흘러 내렸을 물의 흐름은 구불구불 열두 개의 탕과 소를 
    만들며 천상의 아름다운 선녀들을 불러 들였다. 선녀들의 나폴거리는 움직임이 
    나선형 휘돌기를 하며 떨어지는 낙엽으로 대신하는 것 같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소 위에 사알짝 내려앉는 낙엽하나, 선녀의 또 다른 
    환생 아닐까.   

    산의 아름다움은 물이 있는 계곡과 폭포수가 많이 있고 그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보여질때 있다고 본다. 절묘한 산세 또한 그 아름다움에 한몫 하고 사계절마다
    특성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는 모양이다.
    설악을 찾는 이유가 따로 없었다..

    꽉 채어진 산행 스케줄이 아니라면 마음맞는 친구와 함께 너른암반 위에 누워
    이 설악의 가을을 한껏 누리고 싶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미소에서 삶의 질곡은 없어지고 만다. 
    누군가 '산에 와서 기껏 세상의 시름 따위만을 잊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연과 하나 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슬며시 빠져 나가는 것이 시름이라는 것
    아닐까..

    인간이기에 가질수 있는 세속적인 욕망은 스스로를 추하게 만들어 간다.
    우리가 껴안고 사는 시름은 욕망으로 인한 잔재가 아닐까..
    마음을 비우며 자신을 조금씩 정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나'의 재탄생을
    도와주는 곳이 산인 것이다. 

    36명의 여성회원 모두가 합심이 되어 오르는 대승령의 막바지...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허기가 진 듯 지쳐 있었지만 낙오자 한명없이 무사히
    1430m 고지의 정상에 다다르게 되었다. 정상에 조금 미치지 못해 허기짐을 
    참지 못하고 회원 모두가 짊어진 배낭속의 점심을 풀고 끼니를 해결하였다.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후딱 먹어치우는 우리 산악회원들의 왕성한 식욕에 
    설악은 얼른 내려가라 부채질 하는것 같았다.

    줄지어 선 40여명 가까운 여인들의 산행에 등산객들은 한마디씩 툭 던지며
    내려간다. 요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합심되어 오르는 산악회들이 드물다고
    한다. 산악회라는 명목으로 버스안에서의 음주가무로 실제 산에 오르는 사람
    들은 소수에 그치고 오며가며 노는 관광이 대부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들의 행렬에 모두가 기함을 지른다.

    이번 설악산행에서는 선두와 후미에서의 확실한 이끔으로 중간의 끊어짐 
    하나없이 완벽한 공동체의식을 보여준 훌륭한 산행이었다고 본다.

    아주 쉽게 올랐던 오름길에 반해 내림길은 무릎이 아픔을 참고 가는 고통을 
    수반하였다. 무릎에 힘을 많이 주어서일까 아니면 작년까지 내몸을 소홀히 해 
    뼈속에 바람이라도 들어간 것일까 ...
    아픈 무릎은 대승폭포에 다다르면서 그 앞에 놓여진 풍광에 잠시 통증을 잊게
    한다.


    
    




    금강산 구룡폭포, 개성 박연폭포와 아울러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대승폭포는 물줄기가 근 100미터나 되는 우리나라의 3대 폭포중의 하나라고 
    한다.
    오색무지개와 물보라가 장관이라는 폭포수는 무슨 이유였는지 물줄기가 약해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잠시 숨 고르며 펼쳐진 동양화에 물줄기를 그려넣고는 구비구비 펼쳐진 능선을 
    눈에 담는다.

    오후 3시가 넘었을까...
    아찔한 철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하행길은 발만 헛딛으면 절벽으로 추락사할
    위험한 내리막길이었다. 실족사라는 위험표지가 더욱 위협감을 주면서 조심
    조심 발을 내딛는다.
    위를 올려다 보니 하늘이 바로 보인다. 
    우리 회원들의 하강하는 그림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의 모습이다.

    1400고지의 산머리는 저기온으로 나목의 모습 드러내며 늦가을의 정취를 
    맛보게 한 반면 산중턱에는 물오른 단풍으로 인해 햇빛을 투과하면서 자연
    스럽게 조명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우리들의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켜주며 
    연출해 준 빨간단풍 아래 마음은 소녀인 듯 어느 60초로의 회원은 단풍잎을 
    손에 들고 사진 속에 담아 달라고 한다. 

    변변치 않은 솜씨로 셔터만 누를 뿐 별 기술이 없는 내게 부탁을 하니 잘못 
    나올까 걱정도 된다. 어찌되었든 성의껏 그녀를 작은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준다. 


    
    


    주변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는 산...

    곱게 물든 홍엽 하나를 주워 호주머니에 다치지 않게 살짝 집어 넣는다.
    풍상을 거치면서도 흠 하나 없이 고운 색을 만들어 떨어진 낙엽처럼 
    나 또한 곱게 나이들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들기 전에 떨어진 잎새가 되긴 싫다. 
    병들어 구멍이 난 볼품없는 잎새 또한 되기 싫다. 
    어느 누구에게나 길흉화복은 거쳐가기 마련이다. 
    자연을 닮아 남을 배려하며 베풀 줄 아는 마음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여유로움 
    때론 허허로울 정도의 공허함으로, 비워냈지만 가득한 듯한 그런 느낌의 생을 
    스케치하며 살고 싶다. 흠없이 아름답고 고운 단풍처럼 그렇게 떨어져 
    스러지고 싶다. 


    10월이 만들어 준 특별산행..

    아주 오래전 가을을 남겨놓은 기억속의 산행이 다시 되살아 나는 듯
    그렇게 설악은 나를 다시 흔들어 버리고 말았다.

    발갛게 아주 빨갛게......물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