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으로 밝아졌다.
내 어린시절에는 집안팎이 너무나도 캄캄했고
골목길도 어두워서 밤길을 걷기가 무서웠다.
또,어두침침한 호롱불 아래에서
날을 새워가면서 책을 보았고
호야불을 훤히 밝혀 놓고 논두렁도 붙였고
보리타작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너무 어두워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멍석에 누워 있으면 반딧불이가 어두운 밤을 밝혔고
하늘가를 흐르는 은하수의 불빛도 아름다웠다.
여기에 보름달까지 두둥실 떠 올라
창문을 타고 달빛이 안방까지 가득 쏟아져 들어 오는 날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에도 밤이 대낮처럼 환하다.
이웃집 불빛이며, 가로등은 물론이고
냉장고나 전기밥솥에서 새어나오는 빛,
안방전등의 스위치의 작은 불빛들이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 버린지 오래이다.
또, 그동안 신화의 땅 아테네에서
16일간 펼컨?올림픽은 많은 사람들의 밤을 빼앗아 갔다.
금메달을 딸 때마다 울려 퍼지는 함성과 박수소리에
도시의 밤은 깊어만 갔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 동구밖 느티나무에 붙어서
밤에는 단잠을 자던 매미도 잠을 잊어 버린 모양이다.
낮에 울고 밤에 자던 매미가 밤에도 우는 것이다.
불빛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소리를 이겨야 하기 때문에 악을 쓰는 모양이다.
불빛이 어둡던 어린시절이 그립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불편한 줄 몰랐던 어린시절엔
매미 뿐 아니라 이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다 잠을 잤다.
물고기도 밤이 되면 얕은 물로 나와 잠을 잔다.
나무도 잠을 잘 잤고 풀들도 잠을 잘 잤다.
그러나 지금 가로등 밑의 벼나 깨나 콩은
키만 한정 없이 컸지만 꽃이 잘 피지 않는다.
늦게 꽃이 피어 열매가 듬성듬성 맺히기는 하지만
여물지 못한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일것이다.
우리는 가든이나 호텔 앞에 있는 나무를 본다.
작은 알전구를 감아두고 밤을 새워 가며 불을 밝힌다.
밤새 깜박이는 불빛에 나무가 얼마나 시달리까?
꽃잎이 지는 소리.
구월이 오는소리......
8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다.
땀내나는 생활 소품과 더위에 찌든 일상들을 뒤로하고
여름의 꼬리와 가을의 머리가 함께 들어와 있다.
오늘은 빗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창문으로 새어들어 온 새벽바람이 선선해서 놀란다.
가을이 왔다.
계절은 우리들에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빠알간 고추,빨갛게 익은 홍시,
노란 벼이삭,반볼익은 대추,
반쯤 터져 분홍빛 속살을 드러낸 석류,
들녘에는 허수아비도 등장할 것이고
논두렁이?강가에는 고운 구절초 꽃이 피어 날 것이다.
봄이 되면 먼 산에 진달래꽃이 피고,
가을이면 강 언덕에 구절초 꽃이 피어나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고 약속이다.
이 아름답고도 장엄하기까지 한 자연의 약속에
인간이 끼여들어 자연을 방해하는 것은
진정한 문명이 아니다.
여름이 가면 바바리의 깃을 올리고
긴 머리 흩날리며 걷는 여인에게도
가을냄새가 짙게 드리워질 것이며
가을이 보이는 넓은 창가에서 다정하게 마주앉아
커피향에 취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에게서도
가을의 향기가 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높아지고
분주하게 날개짓을 하는 고추잠자리 꼬리가
붉은 고추빛을 닮아갈 것이다.
그러나 밤을 잊어 버리고 살아가다 보면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파란 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코발트 색으로 하늘이 물들지 않을 것 같다.
가을 하늘을 보며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간직된
빛 바랜 사랑들을 되새기고
가슴 아린 그리움을 기억할 것인데...
사실 걱정이 앞선다.
우리가 밤을 잊어 버리고 제 정신이 아닌채로 살면
풀숲엔 가을풀벌레들이 낭랑한 목청으로
가을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