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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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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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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일기(1)


BY 개망초꽃 2004-08-11

평소엔 새벽잠이 많은 내가 놀러간다면 벌떡 일어나는 이유는...
일하러 가는 것보다 노는 게 휠씬 좋다는거지 뭐...

일행은 강원도로 향했다.
초록 치마를 두룬 들판만 봐도 설레이고
머리 풀어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만 봐도 풍성해지고
맑게 흐르는 또랑만 봐도 어린아이처럼 손을 담그고 싶은 마음...

이번 휴가는 교회사람들과 같이 강원도로 방향을 잡았다.
가족이 가는 팀에 내가 같이 끼게 되었지만 서로의 형편을 잘 아는 터라 부담스러울 것도
눈치를 받아 눈칫밥을 먹을 필요가 없는 가족같은 사람들이었다.

맨 처음 목적지는 내 고향산천이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내 글과 다르게 망가지고 때묻은 고향 냇가를 보고
실망을 했다고 했지만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흐르고, 흘러가고 있기에
고향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포근했고 감사했다.

어린시절과는 다르게 냇물은 좁아지고 모래사장은 돌작밭으로 변하고
편리하고 빠른 도로를 만들기 위해 바위를 씻어가며 흐르던 물줄기는
강압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려서 바위는 없어지고
자연스레 흐르던 물줄기는 평평하게 흐르는 냇물이 되었다.
푸른 잔디와 패랭이 꽃이 지천이던 뚝방길은 홍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높다랗게 뚝방을 쌓아 잡초들만 무성해지고
나무하나 제대로 된 그늘을 만든지 못하는 그저그런 뚝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농가 소득을 위해 공장식 닭장이 설치되고 소를 마구잡이로 길러서
물속엔 미끄덩한 이끼만 끼고 다슬기는 어쩌다 하나 귀하게 걸리는
희귀한 물속 생명체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속 내장까지 까맣게 탈 정도로 멱을 감던 어린날의 나의 냇가에서
우리들은 짐을 풀고 닭죽을 끓였다.
여름 휴가때 어느 누구도 놀러오지 않는 조용한 산골 마을 냇가에
우리들은 내 집처럼 시끄럽게 뛰어 놀고 신나게 게걸스럽게 닭죽을 나눠 먹었다.
어릴때도 참 조용한 마을이었는데, 인구도 물론 적지만 강원도 사람들은
성질이 유순한 편이라서 그런지 도둑도 없었고 이웃간에 친구간에 싸움도 없었다.

난 동생들과 이모와 냇가 뚝방길을 거닐며 내 꿈을 그렸었다.
화가가 되는 꿈이었을거다. 선생님이 되어 고향을 지키는 예쁜 미술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서울이 싫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쯤 서울로 엄마를 따라 이사를 가면서 얼마나 서울이 싫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방학때만 되면 책보따릴 챙겨 외할머니가 계시고
언니같고 엄마같은 이모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항상 내려왔었다.

어릴적의 꿈은 이미 깨어진지 오래이다.
꿈이 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난 아무런 꿈을 꾸지 않았다.
그냥 세월이 흘러 평범하게 시집을 가서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나의 꿈으로
나태하고 게으르게 자리를 잡아 버렸다.
시린 청록빛의 물과 세월의 뒤안길로 접어든 마을에 하나 있는 느티나무를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날때마다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와 보며
내 님을 그리며 기다렸다면 기다렸을 것이다.
노란 짚신나물꽃,뿌리를 으깨어 파리 잡는데 썼다는 파리풀꽃,
노루오줌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뚝방길을 토닥토닥 셀 수도 없이 많이 걸었다.
이 꿈도 사라진지 몇 년이 흘렀다.
지금은 하고 있는 장사를 열심히 해서 돈을 좀 벌어서 엄마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난 이곳에
작은 집을 지어 마당에 들꽃을 심고 나무 그늘도 패랭이도 없는 심심한 뚝방길에
들꽃으로 가득한 들길을 만들고 싶은 게 나의 꿈이다라고 같이 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 난 다시 꿈을 꾼다.
어릴적의 꿈은 냇물 줄기가 편리한 도로를 만들기 위해
방향이 틀어졌듯이 틀어졌다 치면 그만이다.
젊은날의 결혼이라는 평범함 꿈은 홍수를 막기 위해 높다란 뚝방을 다시 쌓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고  편하게 웃으며 받아 들이면 그만이다.
이제 가지고 있는 꿈은 찢겨 나갈 건  찢겨 나가고, 잘려 나가야 할 건 잘라내고,
어울리지 않는 욕심은 버려 버렸고, 사랑해 봤자 부질없는 것들은 없음으로 보내버렸다.

들꽃을 보면 한숨밖에 흐르지 않던 입술에 미소가 삐질삐질 흘러 나온다.
눈에 독한 힘을 주고 손끝까지 떨리던 분노도 자연속에 안착하면 두 눈에 선한 빛이 흘렀고
손 끝은 착한 풀꽃을 어루만지게 되어 나도 착하게 꽃잎과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색깔없는 강아지풀도 이쁘고 질경이의 질긴 잎도 사랑스러웠다.
여름날 담장밑에 피어 난 푸른 달개비꽃이
내 고향땅 내 집 돌담밑에서 나와 같이 살아 가길 바란다.
가을 바람속에 쑥부쟁이 꽃이 무성하게 피어 뚝방길에 서서
일제히 연보라색 손을 흔들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