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더하기 일은 이.
이처럼 명확한 계산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계산을 몽땅 다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이 생이라는
문제를 풀기에 나는 너무 머리가 나쁜가보다.
엄마의 치마폭뒤에 숨어 나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치맛자락을 움켜잡은 아이들이 있음을 나는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은 희망이자 나의 몫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세상의 유일한 몫.
엄마의 삶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이유, 그건 다름아닌 내 몫의 아이들을 통해서였다.
어린 시절, 늘 나는 엄마의 삶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난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늘 자기의 주장이 없는 여자. 아버지를 하늘처럼 여기며
그것이 여자의 도리라고 여기며 살아 오신 엄마.
젊은 시절부터 술주정에 여자에 노름까지 해 볼 건 다 해 본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하늘처럼 떠 받들며 살아온 엄마를
나는 아니 우리 오남매는 거의 무시하였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고,
젊었을때 도망이나 가지 왜 사느냐고.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따지고
대들기도 했다.엄마는 그랬다. 너거 때문이라고. 너거 나두고 내가 어디를 가느냐고.
그 때는 엄마의 말이 한 무능한 여자의 변명이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싫었고 오히려 그렇게 힘들게 가정을 지켜온 엄마보다는
우리 오남매는 아버지를 더 좋아했다.
엄마처럼 무식한 여자때문에 아버지의 생이 어긋난 것이라고까지 믿어버릴 만큼.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생이란 건 그렇게 수학문제처럼 간단한 게 아니란 것을.
간단명료하게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란걸 이제사 깨닫게 되었다.
엄마의 삶을 나는 답습하고 있다.
도리질하며 그렇게는 살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삶을
어처구니없게도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이제 말한다.
나는 못 배워 그렇게 살았더래도 니는 배울만큼 배운 아가 와 그러캐 사노?
엄마는 막내딸을 내려다 보며 한숨아닌 애를 끓이신다.
그렇다. 누구나 타인의 입장에선 쉽게 말할 수 있다.
눈에 선하게 보이는 길을 그렇게 무작정 가고 있느냐고.
그러나 막상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직 그 길만이 외길이다.
그 길에는 살아 온 날들이 채곡채곡 들어차 있으며,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유일한 시간들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라고 내 던져 버리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마흔의 내 삶을 변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캄캄한 터널인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양손에 하나씩 내 아이들을 데리고 서성이고 있다.
터널이 그래도 끝나 볕이 드는 들판이 나오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고
그것으로 아이가 내게 추궁하면 변명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