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이면 내 며느리랑 한집에 산지 만5년이 된다.
그간 함께 살아온 이런 저런 이야기를 순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적어보고 싶어졌다.
며느리와 한 부엌에서 살림을 하면서
한가지 부탁한 일이 있다.
"냉장고에서 버리는 일은 내가 맡기로 한다."
그 무렵 인터넷에서 어떤 어르신이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이유인즉은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밤을 말려놓은 것을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상의 없이 버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말라비틀어진 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나도 실은 말른 밤을 왜 냉장고에 두었던가 물어보았으니
넉넉히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르신은 그것이 한약재료가 된다고 한다.
일부러 잘 간직했던 것을 버려서 화가 났다고 한다.
일파만파로 새아기가 발직하다느니, 배운데가 없다느니
겁이 없다느니, 결정적 허물이 되는 것처럼 말했다.
며느리를 몹시 나무랬지만 화가 덜 풀린 것 같았다.
가치관의 차이다.
부모님에게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이
신세대에겐 가치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냉장고에서 고부지간에 감정이 상하면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하긴 마음의 틈새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나는 법이니.
내가 아껴 간직해 두었던 것을 며느리가 홀짝 버렸다면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해주었던 말을 명심한 내 며느리는
냉장고에서 단 한번도 단 한가지도 버리는 일이 없다.
먹던 김치.말라버린 찌거기 찬밥, 무엇이던 내 손에서 버리도록 그냥 둔다.
이제 살림이 익숙해졌고 5년이나 되었건만 선듯 마음대로 버리거나
"어머니. 이거 버릴까요?" 물어보고 버려도 되련만
전혀 묻는 일도 없고 버리는 일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냉장고 청소는 내 몫이 된 셈이다.
그래도 이쁘다.
내 말을 존중하고 명심해 주는 것이
깔끔하게 냉장고 청소를 잘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가 손이 미쳐 못가서 냉장고 속은 때로 엉망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며느리가 이쁘다.
구시대 게으른 시엄마의 말을 불평 한마디 없이
참으며 명심하고 지켜주는 내 며느리가 나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