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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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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BY 天 2004-04-29

아침부터 부산스레 움직여서인지 물오징어 햇볕에 꾸덕꾸덕 말라가듯 노란 빨래줄에서 바스락 거리는 빨래들이 보기 좋았다. 새벽에 내린 꽃비는 여분의 먼지도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톡톡히 한 듯  벌려진 창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공기가 신선했다.

늦은 커피물을 올리려는 순간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나 입가에 미소가 살포시 번져났다.

어제 오후, 딸애를 키우면서도 한 번도 받질 못했던 남자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전선을 통해 들려오는 입 달싹이는 혀 맛엔 미소년의 수줍음이 가득 배어있었다.

"여보세요?"

"저, 저기..."

"누구니?"

"저... 같은 반 00 인데요. 거기 00 집 맞...죠?"

애써 과장된 침착성이 빤히 보이는 어투였다.

"00 좀... 바꿔 주시...겠어요?"

"그래, 잠깐만"

옆에있는 딸에게 수화기를 내주면서 '아하! 그렇구나' 라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상황에 눈꼬리 가득 웃음이 잡혔다.

"음, 음, 어... 어, 음...어. 음.."

주책맞은 두 귀는 안테나를 최대한 올려 한 자도 빠트리지 않으려 바짝 달라 붙어서 엿들였다. 1분여를 알아 듣지도 못할 소리를 주절거리더니 '딸깍'하고 끊어 버렸다.

"뭐야? 00 가 누구야? 왜 전화했대?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았대? 뭐라면서 끊어서? 응? 말해봐?"

나의 끝없는 채근병에 "그...냥. 같이 놀 수 있냐..고"  아이는 얼굴에 불그스레한 홍조를 비치며 파르르 떨리는 눈썹으로 날 회피했다.

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힐끔힐끔 아이 심장에서 타오르는 숫기를 감지하려 졸졸 따라 다녔다.

 아직은 이른 듯한 나이인데 남자애 목소리를 봐서는 그냥 편한 전화는 아닌 듯 했다. 요즘엔 초등생들도 친구 하나씩은 다 있어 반지도 교환하고 한다던데 어쩜 내게도 예견치 않은 우스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걸레질 한 번하고 히죽! 설거지 하면서 히죽! 아이 얼굴보며 히죽히죽!

마치 첫 설레임의 당사자가 나인 양 진종일 흥분 되었다.

 

소실적 아득한 기억속 누군가를 위해 애태우던 핑크빛 순수함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김.태.우'.  

반반한 외모에 걸맞지 않게 퍽이나 개구진, 미소가 풋풋하게 아름다운 남자애였다.

첨 짝꿍이 되던 날,길다란  청록색 책상 사이로 38선을 그어 놓고" 넘어 오면 알지" 라며 뭉퉁한 주먹을 얼굴 가까이 대보이며 나의 수줍음에 일격을 가했던 아이.

그 선을 넘어간 지우개도 연필도 별사탕도 심지어 팔꿈치도 헛으로 넘기지 않고 꼬박꼬박 보복을 했다.  날이 갈수록 그 애 가방엔 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불어났고, 꼬집힌 팔꿈치는 늘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타고난 재간둥이라 따라붙는 친구도 많았고, 복도를 지나칠때마다 여자애들의 힐끔거리는 관심어린 눈길도 익숙한 일상처럼 가벼이 넘기며 늘 활기찬 생활을 하던 아이.

하루도 편치 않은 생활에 늘 눈물 방울 달고 살면서도 자리 바꿔 달라는 항변도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하얀 벚꽃 비도, 쪽빛 잎 내음도,작열하는 태양아래 피어오른 선홍색 장미향도 하늬 바람에 날려 보낸 뒤, 황갈색 은행잎이 지천으로 깔리던 어느 날,

체육시간  때 달리기로 지친 입김을 훅!훅! 거리고 있던 내게 툭하니 내밀던 생뚱맞은 손길에 뜨아해 하며 올려다 보니 하얀 손수건을 든 그 애가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냥. 닦어!"

그러곤 휙 하니 아이들 무리로 사라졌다.

첨으로 당해보는 그 애 행동에 넋 나간 사람마냥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후로 수시로 부딪히는 팔꿈치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미묘한 떨림이 조금씩 자라나더니 옆선 넘어 힐끔거린 눈길에 잡히는 그 애 손가락이 퍽이나 따사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혹 눈길이 마주 칠때면 황급히 돌리던 벌건 시선을 감추느라 헛 기침을 여러번 해댔었다.

이 겉 잡을 수 없는 열병은 따사롭게 내리는 눈가루가 흩날리는 계절에도 어김없이 계속 되었고 하루라도 그 애에게 향한 시선이 어깨 거리만큼에도 못 미치면 불안해했었다.

학년 말, 애써 태연한 척 그 질긴 설 익은 사랑병에 눈물 감추며 이별을 고할 때  꼬깃해진 종이를 책 사이에 끼워주며

"나중에 읽어 봐"

종잇장에 구겨진 흔적들은 밤새 갈등으로 시름하던 그 애의 온기가 가득 담겨 있었고, 떨리는 손길로 화장실 구석 자리에서 펼쳐든 종이에 적힌 짧막한 글 한 줄.

'나, 첨 부터 네가 좋았어!'

뜻하지 않은 수줍은 고백에 행복에 겨워 쓱쓱 눈물 닦으면서 보고 또 보고...

이제사 짝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이었음을 느끼며 따뜻한 맘으로 집으로 향하던 걸음.

안개처럼 자욱한 그 풋풋한 짝사랑이 몹시도 그리워져

두 눈 꼭 감고 그 때를 그리던 얼굴에도 핑크빛 연정이 되 살아났다.

지금은 뭘하고 있을까?

다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엄마! 엄마!"

딸애의 볼멘 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왜?"

"배고프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도 대답을 안 해!"

아, 미안하려다가

"야! 넌 왜 타임을 못 맞추고 소리 지르냐. 다 깼잖아!  좀 더 있다 얘기하지. 으이구."

"뭘?"

"됐어!"

홱 돌아서면서도 모처럼 아이덕에 잊혀진 그 애를 떠올릴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이젠 딸 애가 느끼게 될 그 소중한 사랑 앓이가 괜시리 기대된다.

내심 맘 속에서 울려 퍼지는 행복한 한탄.

'아! 이 놈의 인기는 대를 이어 유전이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