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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무척 그립다....


BY 얼그레이 2004-03-29

눈이 부시도록 따스한 햇살이 메마른 머리칼위로 쏟아지자 ,
차디찬 내몸에 그 온기를 느끼고싶어 손으로 슥슥 쓰다듬어봅니다...
그리곤 가던길을 멈춰 적당히 앉을만한 곳을 찾아앉아
따가운 햇살을 내리쬐는 곳을 향해 응시하노라면,
이내 눈이 부셔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두 눈을 지긋히 감습니다..
더없이 쾌청한 날씨에 들떠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맘이 간절해질때면
유난히 그리운 이가 있습니다...

타인의 티끌만한 허물조차도 보듬어줄 아량이 한참 부족했던 이십대초반때,
내가 그녀를 첨 만나게된건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동생과의 만남속에서였습니다.
그녀는 그때 거기서 한국인들사이에서 요즘 말하는 소위 왕따였습니다.

나보다 무려 6살 많지만,
무척 애띤얼굴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순수해뵈는 웃음과 말투로,
그 한국인동생이 묻지도 않은 그리고 궁금해하지도 않은...
나에게 그녀에 대한 시시콜콜한 내막을 알려주기전까진
그녀를 본 첫느낌은 무척 산뜻하고 친근했습니다.

홍콩으로 일찌감찌 건너가서 거기서 기반을 잡고 살고있는 부모와 함께 지내다,
한때 고등학교을 뉴질랜드에서 다니고,
그러다 이나라 저나라를 전전하다가,
그녀가 당시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때였습니다.

그나이에 결혼을 약속해둔 진실한 남자친구한명 없다는것 말곤
겉으로 보기엔 물질적으로든 아무것도 부러울것없어 뵈지만,
그녀의 얼굴의 한쪽 구석에 뭔지 모를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걸
얼마후에나 알았습니다.

오랜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줄담배와
잦은 쇼핑,
뭇사람들에게 베푸는 넘치는 물질적 호의와
믿을구석이라곤 눈씻고도 찾아볼수 없는 남자들과의 무분별한 사귐으로
그렇게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심연 저 깊은곳의 우울함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나머지,
단순히 그녀에 대한 안 좋은 평판만을 듣고선
요즘 초중고생들이 아무런 죄책감조차없이 한사람을 왕따시키는걸 즐기듯이,
저 또한 그런말을 주저없이 씹어버리는 공범자가 되고말았죠...

한국인이 아닌 다른 외국사람들은
설령 나쁜 평판을 가진 사람이라도 속으로 품고있는 맘과는 달리
그 사람을 겉으로 대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대개 그렇치가 않아서
그녀에게 다소 냉냉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다 나의 등장으로인해
그나마 친했던 한국인동생(앞에서 언급한)과의 사이가 전보다 더 틀어져버린
그녀가 문득 외롭고 가여워보였습니다.
그런 동정심의 발로에서 그녀와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듣던대로 그대로였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화나든지 슬프든지 자기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를 다 드러내며
예수그리스도가 백인이었다는 얼토당토한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며
아무때나 내키는대로 남의 방을 제방 드나드는 행동이며...

하지만, 유난히 크게 부각된 그녀의 단점들로 인해
그녀만이 갖고 있는 매력과 장점들을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이 무심하게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건
그다지 긴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감정에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물론 그녀도 남들처럼 질투심이라는걸 가지고 있었지만,
남의 좋은점을 보며 절대로 비야냥거리며 말하거나,
그 사람의 부정적인 면을 일부러 부각시켜서 좋은점을 은근히 커버해버리는 비겁함이
순수한 그녀에겐 눈씻고도 찾아볼수 없었음을....
적어도 내가 아는 그녀는 남의 장점들을 자기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자존심땜에 지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선뜻 못 건네는데반해,
그녀는 그런말을 절대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절대로 자기잘못을 외면하거나 은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넘 순진할정도록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았습니다.

평판대로 그녀가 나이에 비해 그다지 성숙한 인격체는 아니었지만,
흔히들 살아온 나이에 걸맞게 적당히 고고한척하고,
자기보다 나이어린사람에게 눈을 가늘게 지긋히 뜨며 내려다보는 알량한 거만함보다
그런 그녀가 훨씬 매력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훨씬 지난 지금의 내 나이...
묻을만큼의 나이때가 적당히 묻어있고,
마음밭에 두툼한 한줌의 흙이 더 얹어져있는 가식의 허물로 뒤덮힌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깊이 자각하며,
내면의 밭을 새로이 일굴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을때마다
그런 그녀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눈부시게 내리째는 햇살도 모자라,
내몸에 은은한 전율을 일으키도록 간들거리는 미풍이 부는 날이면,
무심결에 그녀와 함께 떠났던 배낭여행이
더욱 간절해지고 아련해집니다...

우연히 들춰본 사진첩속의 그녀는
그녀 나이와는 무관하게 뒷걸음질치는 해맑고 어여쁜 웃음을 환하게 짓고 있습니다.
그녀 옆에 다정히 앉아있는 저는...
그때만큼 행복해본적이 별로 없는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마지막 아쉬운 작별이후로,
한국으로 들어와서도
그녀에 대한 안좋은 소식들을 간간히 접할때면
그녀의 연락처조차 도무지 알아낼 수 없음에 가슴만 답답해 할뿐이었습니다.

첫결혼기념일을 계기로 남편과 홍콩을 갔을때,
영화 '첨밀밀'에서
두 남녀주인공의 어차피 만나게 될 인연의 필연적 만남을 떠올리며,
단 며칠정도면 홍콩섬과 반도의 명승지를 줄줄이 다 꿰수있을 정도록
좁다면 좁은 그 곳에서
행여나 그녀를 우연이라도 길에서 마주칠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그다지 무리하지않은 기대속에서,
수많은 인파로 내 어깨에 뚝뚝 부딪치는 타인들의 무심한 스침들을 마냥 잊은채로
사람들이 분주히 제갈길을 오가는 번화가속에서
두눈을 부릅뜨고 두리번두리번거리곤 했었습니다.

저 먼곳까진 아니더라도
홍콩정도의 충분히 가깝다면 가까울수 있는 거리만 되어도
지금이라도 그녀가 사는 곳을 알라치면, 당장이라도 날아가고싶습니다...

그녀도 이젠 불혹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겠죠.
피부에 해로운 담배로 인해 애때어보이던 그 얼굴도 행여나 삭지는 않았는지...
그녀의 평소 소원대로,
그녀만을 무진장 사랑해주는 한 남자와 결혼해서
자식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지...
너무도 궁금합니다...

떠나고 싶을때
아무런 머뭇거림없이 훌훌 떠나곤 했었던 그녀와 나...
그거 하나만으로
우린 나이라는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마음 맞는 친구라고 하기에 손색이 전혀 없었던 사이였습니다.

내 마음 딱히 둘곳없어 정처없이 헤메이는 이런 날엔,
그런 그녀가 더욱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