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화내서 미안해."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던 내게 남편이 불쑥 던진 말이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께 어딘가가 먹먹해지더니 꼭 주먹만할 듯한 아픔이 한 줌 찾아 들었다. 미안하다는 남편의 이번 말은 분명히 스치듯 지나간 예전의 말들과는 아주 딴 판인 것이었다. 정말 남편은 많이도 변했다.
돌이켜보면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함께 한 세월동안 나는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진지한 어조의 미안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어쩌다가 장난처럼 그런 말을 흘리거나 아니면 말이 아닌 다른 행동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체한 적은 있으나 직접 그 말을 드러내놓고 했던 적은 없었다. 그 말은 오로지 나의 전유물이었고 우리 부부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도 바로 나의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고작이었을 만큼 남편은 그 말에 무척 인색한 사람이었다. 사실 인색하기로는 미안하다는 말뿐만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에 있어서도 한 치의 뒤짐이 없을 정도로 남편은 속내를 내비치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때는 보기만 해도 나를 숨막히게 만들만큼 차가운 모습을 자주 비친 남편이었다. 그런데 세월 따라 그런 모습은 차츰 흐릿해져가고 대신 여러 형태의 존재 감으로 나를 훈훈하게 데워주는 남편의 모습으로 조금씩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변화는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처음 남편과 나는 중매로 만났다. 당시 내 주위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중매보다는 연애로 결혼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내게는 누구나 쉽게 하는 그 흔한 연애가 더할 수 없이 어렵게 느껴졌으니 그것도 아마 타고난 재능이란 게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연애 경험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꾸던 처지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남편을 만나자마자 바로 사랑에 빠져드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를 만난 지 열흘도 채 안 된 어느 날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조금만 더 남편의 애간장을 태우는 고단수의 기술을 발휘해 보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아마 그랬다면 아이들 앞에서도 아빠가 엄마를 죽으라고 좋아했었다고 으쓱거리며 자랑을 늘어놓을 수도 있으련만...
사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모두가 알 것이다. 또한 어려운 만큼 그것이 멋지고 훌륭한 일이란 것에 대해서도 모두가 공감하리라 생각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나게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사실 세상 일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해 내는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쉬운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이 힘들고 헤쳐 나가기 어려워도 보다 소중한 것을 위해 묵묵히 인내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 뜻이다.
내가 선택한 결혼도 그렇게 쉽고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만난 지 열흘도 채 못 되어 결혼을 약속하고 두 달만에 약혼식을 올리고 그 두 달 후에 결혼을 하였으니 만난 지, 고작 5개월도 못 된 시점에서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 는 참으로 엄청난 결단을 내리고 만 것이다. 물론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호감의 정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감을 남편에게서 처음 느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전에도 가슴 설레게 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으니까... 다만 그 때의 감정들은 결혼을 생각할 시점에 찾아 온 것이 아니었고 또한 바람처럼 짧게 스쳐 지나갔던 터라 나와 영원이라는 이름의 인연으로 맺어지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때 결혼이라는 인연은 적당한 때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 적당히 좋아하는 감정을 지니게 되는 그 타이밍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남편을 적당한 때 만나게 되어 그만 넘치도록 좋아하고 말았으니 서로를 더 깊이 알려는 진지함도 갖지 못했고 그럴 여유도 얻지 못한 채 결혼이라는 맹목적인 결승점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쳤던 것이다. 그리고 5개월의 만남은 우리를 이렇게 영원으로 묶어놓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겁 없던 결정이었던가...
그 결과, 나는 아니, 우리는 혹독한 시련들을 겪게 되었다. 서로에게 스며들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쪽으로 스며들어주기를 바라다보니 번번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처신들이 서투르고 어리석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결혼까지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런 상황들은 이미 결혼 전부터 감지되었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부분들도 많았던 것 같다. 다만 청춘남녀의 뜨거운 애정이 모든 것을 덮어두고자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러니 힘든 결혼생활의 책임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전가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원망했다. 특히 남편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모든 것을 남편의 책임으로만 생각하고 내 인생이 억울하고 더없이 가엽기만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남편과 나의 운명은 결국 서로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다시 함께 길을 걷게 되었고 나는 남편에게 스며들기로 작정했다. 눈물에 또 눈물을 흩뿌리며 가슴에 커다란 멍과 흉을 지닌 채로...
그런데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이 변해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때로는 오빠 같은 모습으로, 친구 같은 모습으로, 아빠 같은 모습으로 내 곁에서 내게로 스며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한단 말해주지 않아도 미안하단 말 해주지 않아도 내 가슴에 스며들어 멍을 풀어주고 흉을 지워주었다. 물론 전부가 다 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부가 다 변하면 어찌 그 사람이 내 남편일까... 다만, 이젠 예전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해도 내 마음이 그것에 칼날처럼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남편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힘을 내게 준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남편을 보는 것이 한결 수월하고 덜 지치게 된다. 그만큼 나도 변한 것이리라...
우리 부부를 생각해보면 결혼생활로 갈등하는 부부들에게 나름대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정 힘들어서 결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면 우선 휴혼(休婚)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로에게서 잠시 등을 돌리고 서 있을 때 자꾸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거나 아니면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다시 그 사람을 마주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사랑은 있으나 서로의 차이 때문에 힘이 든 것이었다면 그 때는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여지가 많을 테니까... 절대라는 이름으로 생각했던 내 남편을 변하게 만든 것도 바로 시간이었으니까...
남편에게서 처음 들은 미안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내 마음을 녹여주었다.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부부사이에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것 같다. 그것이 사람의 얼어붙은 마음도 녹일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 녹는다는 것은 섞인다는 말과 한가지로 통한다. 서로의 마음이 녹을 때 부부는 정말 일심동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잠든 남편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참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그 때의 내 눈빛은 마치 귀엽게 잠든 아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을 것 같다. 남편이 날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남편을 더 사랑하면 어떠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아는 나는 그래서 남편이 고맙다. 남편이여,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