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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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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에게...


BY 개망초꽃 2004-03-04

봉당으로 올라가 신발을 벗고,
마루에 걸터 앉아 다리를 그네 태워주면서 앞을 내다보면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는 외갓집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바로 보였다.

그날은, 내가 서럽게 울던 날은
한 낮에 아무렇게나 누워 낮잠을 자다 설핏 깨어나니
아무도 없는 외갓집은 못견디게 고요했다.
미루나무만이 바람에 나뭇잎을 뒤집으며 최소한의 신음소리로 나와 눈이 마주쳐야만 했다.

외갓집으로 들어오는 대문 바로 앞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키다리 미루나무 한그루가 살고 있었다.
외갓집 나이만큼 미루나무 나이도 비슷할거라는 생각만 스쳤을 뿐,
미루나무는 나에게 관심의 대상이 전혀,아주 전혀 아니였다.
학교 갔다오면 아무데서나 뒹굴던 몸으로 동네 아기들 똥을 먹던 더러운 입으로
내 얼굴을 핥아 대던 똥개만이 나를 더 반가이 맞아 주었고,
밤이면 할머니 품속에서 젖가죽이 소 거시기처럼 칙~~ 늘어진
할머니 젖을 만지작거리며 자는 것이
내게 있어 더 흡족했고 더 보탤 것 없이 포근했다.

그러나,어느 여름날 친구가 있어도 심심하고 찌르는듯한 여름방학이 무료하고
유난히 엄마가 보고싶어 울적했다고 그랬다고... 그래서 울었을 것이다.
어느절에 잠이 들고 뭔가가 와사삭 ...샤샤삭...하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났는데 미루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왜 그리 슬프고 눈물이 흐르는지 바람에 흔들리던 미루나뭇잎은 날 향에 손짓을 했다.
검푸른 초록이었던 나뭇잎이 손바닥이 되어 나에게만 하얗게 하얗게 흔들고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다음 해
남동생 하나는 이모집에 두고 난 외갓집에 맡기고 서울로 떠나가셨다.
떨어지기 싫은 나이면서도 엄마가 가는 길에 앞장서서 울지도 못했다.
손바닥을 흔들며 "엄마! 빨리와야 해" 했을 뿐.
엄마는 늘정거리며 오시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싶다고 외할머니에게 떼도 쓰지 못했다.
그래도 여름방학땐 오실 줄 알았다.
방학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어도 열흘이 넘어도 엄마에겐 소식도 없었다.

미루나뭇잎의 손짓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바람따라 흔들리던 미루나뭇잎이 엄마한테 흔들던 손바닥 같았다.

미루나무에 앉아 까치가 울면 "오늘은 엄마가 올지도 몰라 그치 할머니?"
"그려...에그.."한숨을 쉬시며 외할머니는 머리에 세수수건을 쓰고 부엌으로 가셨다.
봉당에서 신발을 신고 미루나무곁으로 달려 가면
까치는 입을 합죽하게 다물고 과수원 쪽으로 빨랑 날아가 버렸다.

할머닌 된장 찌개를 맛잇게 끓여 놓으시고 나를 부르셨다.
"쫑미야~~밥먹어라"
감자 넣은 밥 한숟가락 입에 물고 된장찌개 한 숟가락 입에 넣고....
그러다가 그날도 엄마가 안오시면 할머니 젖가슴에 안겨 잠을 자려다
"내일은 엄마가 올까? "
"오야..그려 그려."

또 며칠이 지나도 엄마는 안오셨다.
친구랑 공기 놀이하는 것도 싫고 사촌여동생이랑 땅따먹기하는 것도 심통이 나고
냇가에서 멱감는 것도 지겹고...
그러다 아무렇게나 낫잠을 자다 깨어나
미루나무를 보고 가슴이 울렁이고 눈가가 뜨근거리고 입이 삐죽나오다 울고 말았다.
할머닌 분명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을거야.
엄마 오냐고 물었더니 그려그려 오냐오냐 했는데 다 거짓말이였어.
이모는 감자떡 해준다면서 해주지도 않고,엄마같았으면 해 줬을텐데...
엄마는 왜 아버지 같이 일찍 죽는 사람을 만나 나를 낳은거야.

"키큰 미루나무야? 넌 엄마가 오는 길 저편을 볼 수 있니?"
"......." 미루나무 넌 대답도 안한다.
"난 돈 많이 벌어오는 것도 싫어. 엄마만 있으면 좋겠어."
"샤샤샤 샥~~" 너도 그렇다고 대답하는거로구나.
"엄마는 내가 보고싶지도 않은가봐."
"아사사삭..."
아니라고? 그래 아닐거야...엄마도 내가 무척 보고싶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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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많이 많이 흘러 내가 엄마 나이가 되어

엄마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 친정엄마 옆에 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고향 외갓집에 살던 친척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외갓집은 빈집으로 남게 되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찾아 갔던 어느 여름날,

마당엔 잡초만 무성하고 낮잠을 자던 마루는 세월에 못이겨 이가 빠져있었다.

그리고...날 울리던 미루나무는 밑둥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낯선 집 울타리가 단단한 시멘트로 세워져 있었다.

외갓집이 폐허가 된건 참아냈고,마루가 꺼져 있었도 괜찮았는데

미루나무가 없어진 건 견딜 수 없이 허무했다.

가슴에 추억 하나가 빠져 미루나무 끝가지가 있던 하늘가 빈자리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얘들아? 이곳에 미루나무 한그루가 있었지.

바람이 불면 미루나무는 두가지 색으로 변했는데...

꼭 서울도 떠난 할머니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는데...

엄마는 이 미루나무를 보며 할머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아이들도 같이 미루나무 끝자리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