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더 더욱 요란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눈물받이 딸 아이가 개학을 하였기 때문이지요.
아침 여섯시
간단히 아침 준비를 시작하면서 아이의 등교 길을 서두릅니다.
머리를 감기는 일부터 의료기를 설치한 다리에 반 기브스를 대고 붕대를 둘둘 감아 올립니다.
어느때는 이일이 쉽게 처리 될때도 있지만 어느때는 아픔을 호소하는 탓에 아주 여러번 되풀이 하곤합니다.
아이 목발
휠체어
앏은 이불 두개
방석하나
아이 책가방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물이 챙겨 졌습니다.
남편과 함께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학교로 향합니다.
우리 아이 덕택에 학교도 요란해지고 말았습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을 비롯하여 담임 선생님 그리고 여러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 등교를 반김니다.
운동장을 쓸고 계시던 교무 부장님도 눈 인사를 건뇌 주십니다.
역시 학교는 학교였어.
처음에는 선생님들께서 우리 아이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실 배치로 작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사정을 알고부터는 아이가 편리 하도록 최선을 다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께서 한결 같이 말씀하십니다.
공부를 하겠다는 아이 공부하게 해주는것이 학교의 의무라고.
죄종 합니다.
죄송 합니다.
요란한 아이를 두어서 죄송합니다.
너무 요란을 떨어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차라리 결석을 시키면 여러사람 편할것을 하는 생각에 몸 둘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부하려는 학생도 기특하고 아이를 뒷 바라지 하는 부모도 대단하다고.
학교를 오가며 낮 설었던 선생님들과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아이 몇일 학교에 나가 보더니 너무나 다리가 아프다고 하소연 합니다.
조금만 부딪혀도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다 보면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턱이 있습니다.
이 턱을 넘을때 마다 아이는 비명을 지릅니다.
뚝딱 뚝딱
어느새 크고 작은 턱에 베이어 판을 이용하여 휠체어 길이 만들어 졌습니다.
오우~ 땡큐.이렇게 고마울수가...
교장 선생님께서 수시로 물어 오십니다.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라고.
그리고 용기 잃지 말고 아이만 잘 기르라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매일 같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시간을 맞추어 용변을 처리하기위해 간학교엘 갑니다.
오늘은 통증을 호소하던 아이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마도 베니어 판 휠체 길 덕택인것 같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부터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다리가 없었으면 좋게다고. "
힘들면 결석을 하라고 했더니 아이가 하는말
"학교 생활에 기본은 지켜야 될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공부가 떨어지면 자기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는 사람들은 어떡하느냐고 ,
그래서 더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이 아빠도 틈틈히 학교 생활을 돕습니다.
그리고 하는데까지 해보라고 말합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너만은 꼭 공부를 시켜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관대한 아빠에게 오히려 미안한 모양입니다.
공부에 욕심이 많은 아빠!
하긴 그러니까 자기도 마흔이 훨씬 넘어서까지 공부를 하였겠지요.
요즘 딸 아이 뒷 바라지를 하는 남편을 보면서 " 진짜 아빠로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전자 검사 해볼 필요가 없겠군 하면서 피식 웃을때도 있습니다.
몇일전부터 허리가 결린다고 말합니다.
애 추스리느라고 힘들어서 담이 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속을 썪어서 몸무게도 제법 많이 빠졌습니다.
저 사람이 그때 내가 그렇게 미워하는 남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나는 그 사람과 이혼을 하려고 아주 여러차례 별러 왔었답니다.
우리 부부가 등을 돌리기 시작한것은 우리 남편의 아들 타령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곰처럼 말이 없다가도 술만 한잔 들어가면 아들 타령이 시작 되었으니까요.
"아들아 ,아들아."하면서 온 방안을 흔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이 원망 스럽다 못해 증오심이 차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아파해야하고 함께 나누어야 할 고통을 그렇게 파헤치는 남편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편.
아들에 대한 추억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나도 남편을 향하여 굳게 굳게 빗장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오열을 토했습니다.죽을때까지 내가 정말 죽을때까지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 하였습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열심히 산 것 뿐이라고.
그때 나는 그 흔한 동창회 한번도 안 가봤고 살림 또한 완벽에 가까울 만큼 해냈었으니까요.
시부모와 사이도 원만하고 시누이들과 한번도 말다틈을 나누지 않았을뿐더러 사치품 하나도 몸에 지녀본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복이 없는것은 어쩔수 없는 운명이라고.
그리고 복이 없다면 그것이 왜 나 혼자만의 탓 이냐고 우리 부부 공동의 탓이 아니더냐고 통곡했습니다. .
그리고 곧바로 우울증이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말을 한마디도 안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미술학원에 다니던 우리 딸 아이는 엄마 얼굴을 그리고 난 후엔 언제든지 눈물을 빠트리지 않고 그려 놓았습니다.
아니 엄마 얼굴은 물론 모든 동물들의 얼굴에도 반드시 눈물을 그려놓았습나다.
너무나 어리석인 이 가엽은 중생은 남편의 마음을 붙잡아 보겠다고 또 다시 아이를 갖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다행히 힘들게 힘들게 아이를 갖을수 있었지만 지나친 우울증으로 8개월만에 조산하고 말았습니다.
가엽게도 우리 둘째 아들은 10일만에 세상을 떠났지요.
우리 남편은 두 아들을 고향 뒷산에 묻으면서 정말 미쳐버렸습니다.
아주 거세게 통곡을 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이혼을하고 다시 결혼을하여 아들을 낳겠다고.
그리고 내가 더 참을수 없었던것은 재수없는 거 만나서 되는게 없다는 외침 이었습니다.
하는일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내탓
시 아버지가 술 주정을 해도 내탓
심지어는 직원들이 속을 썩여도 내탓을 하였지요.
나도 서서히 이별 준비를 시작하였지요.
그리고 꼼꼼하게 이별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혼후에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어머님께 이혼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성 통곡을하는 시어머니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늦은밤 전화를 하신 시어머님께서
"내 아들 살려다오."
"내 아들 살려다오."
"내 아들 내가 안다.너를 버리고 살놈이 못된다.걔가 너를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다.방황이다 방황이다."
하시면서 통곡을 하셨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이혼을 결심한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강하게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날 밤 우리 시어머님께서는 중환자실 응급실로 나를 불렀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가망이 없으니 장례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을 혼수상태 빠지셨던 어머님께서 간간히 며느리인 저를 알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 살려다오.내 아들 살려다오."하셨습니다.
마지막 퇴원을 하시던 날에는 제손을 꼭 잡으면서 이번 한번만 참아주면 내가 죽을때까지 너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는수없이 이혼의 위기를 넘겼지요.
그러나 한번 시작된 이혼설은 쉽게 끊어질리 없지요.
우리 남편 한달에 한두번 빼놓고는 거의 서너시에 귀가를 하였지요.
그러다보니 자연 외박이 잦아 질 수 밖에요.
또다시 이혼 얘기가 나왔을때
아뿔사 우리 딸 아이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49일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 던날 아내에게나 아이에게나 너무나 차가운 눈빛을 뿜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남편을 처다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흔히들 그러지요.
남편보다 자식이 더 소중하다고.
천만에 말씀.
그것은 양쪽으로 썪어보지 않은 사람은 해답을 알수 없지요.
겪어본 결과 어느 한쪽도 덜함과 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지난 세월 그렇게 아내를 애기르 듯 애지 중지 하던 남편이 등을 돌렸을때 그 고통은 아이를 잃었을때의 고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답니다.
아마도 그때 우리 아이 다리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이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부상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여 수술을 몇번이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나는 그 아이를 감당할 경제력이 없었습니다.
그날밤 나는 남편에게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테니 엄마로써 책임만 다 하게 해달라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종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심"
부처님께서 나에게 마음을 낮추라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기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설하였지만 나는 내가 살기위하여 고통으로 팔만 대장경을 써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