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열 두달중 가장 바쁜 이월 중순.
졸업식에 동료 직원의 송별회와 더불어 환영회가 겹쳐지는 날.
오전 동안의 시끌벅적한 부산함은 졸업생들이 모두 가 버린 순간
마치 연극이 끝난 뒤의 무대 위처럼, 썰물처럼 그렇게 허탈감과 함께
순식간에 썰렁함과 한가함을 가져다 주는 오후.
분위기상 모두들 들떠 있는 것 같다.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어느 학부모의 청에
썩 내키진 않지만 어쨌든 응해야만 한다.
얼굴이라도 내밀어야 할 자리이니...
평소엔 여직원들만 참석했는데 오늘은 남직원까지 동참하기로 했단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니 자연스레 술잔이 돌기 시작한다.
이십여 년간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선 술을 입에 대 본 적이 없었다.
원래가 술을 못 마시기도 했지만
어쩌면 아래 직원들에게
잠시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않은 생각에서였는가도 모른다.
요즈음 젊은 아가씨들은 술도 참 잘 마신다는 생각을 하며
주거니 받거니 건배를 해 대는 그들의 행동을 미소 띤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자아~제 잔 한 번 받으세요~섐님~"
유난히도 애교스런 표정과 몸짓으로 맨 막내 직원이 술잔을 덥석 권한다.
으례히 있었던 일이라 형식적으로 받아두면 되려니 싶어
별 생각없이 술잔을 받았다.
"오늘은 쭈욱 한 잔 드셔야죠~"
안 마시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무래도 작정하고 나온 듯 싶다.
웬지 불안한 예감이 퍼뜩 든다.
나로 인해 분위기가 깨져 버렸단 이미지는 주기 싫어
일단 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 마시고 식탁에 내려 놓았다.
"에이~그런 게 어딨어요? 단숨에 원샷~하셔야지~"
이것이 뭔 소리여???
소주 한 잔을 원샷하라구?? 술도 잘 못 마시는 내게...???
'아니... 날더러 오늘 밤 망가져 보라는거야~?"
웃으며 슬쩍 넘기려는데 그녀의 옆에 앉은 유선생이 한 번 더 거든다.
"어머나...세상에...
장선생님 잔만 받으시고 제 잔은 안 받으실 생각이셨어요?"
어라...갈수록 태산이로세...아예 작정들을 했나 보구만...
오늘밤 나를 잡아 볼 심산으로다...
표정들이 대충 넘어갈 성 싶지가 않다.
'가족적인 분위기' 운운해가면서 내가 그걸 깨뜨리지않기를 바라는 모양들인가 보다.
이를 어쩐다...한 번도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 온 적이 없는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불현듯 이삼년 전 어느 저녁 모임 자리에서 모방송국 여자 아나운서가
연거푸 술을 마셔대며 음료수잔을 앞에 둔 내게 한마디 했었던 게 떠오른다.
"난 이런 술좌석에서 모두들 술에 취했는데 혼자서만 술을 안 마시고 맹숭맹숭한 정신으로
술 취한 군상들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참 얄밉더라..."
말짱한 정신으로 취객들의 주정을 바라 보는 눈길이 고울 리는 없다.
아...저 사람은 본래 저런 면이 있었구나...
술 주사가 좀 심하구나...전혀 그렇게 보이지않은 사람이었는데...
당연히 이런 느낌을 받곤 했었기에 그녀의 지적은 솔직히 뜨끔한 것이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에라 모르겠다...마셔보지...하는 심정으로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우와~~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잽싸게 유선생이 잔을 권한다.
다른 때는 전화도 잘 오더니 오늘은 이 위기에서 날 구원해 줄 친구 하나도 없나...
전화 받는 다는 핑계로 슬쩍 밖으로 빠져 나가고만 싶은데...
결국 옴싹달싹 못하고 석잔을 받아 마시게 되었다.
이러다가 동료들의 열댓잔 술을 모두 받게 되는 거 아닌지...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제발 전화 좀 해 다오...나 좀 구해 주라...ㅠ.ㅠ
다행히도 즉시 친구가 전화를 해 주었다.
"평소에 좀 풀어 줘라...
너무 무게만 잡지 말고, 좀 느슨한 면도 보여 주고...
그나저나 술도 못 마시는 네게 그 직원들 왜 그런다니..."
풀어주라고?
그럼 ...내가 억압이라도 한다는 건가...
말랑말랑한 구석이라곤 찾을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표현하던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른다.
나 ...
그렇게 깐깐한 여자 아닌데...왜들 그렇게 보는거야...
이차는 노래방, 삼차는 나이트란다...
술들이 거나하게 취했으니 나는 오늘 밤 무사히 지나기는 애초에 틀린 것 같다.
제발 별 일 없이 살아서만 집에 들어가게 해 다오...
에라...그래...나도 망가져 보자...
탬버린을 집어 들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 와 분위기에 동참하기로 했다.
급기야 탁자를 무대 삼아 올라 간 막내들의 흥겨운 재롱을 바라 보며
그들과 함께 망가지기 위해 나도 온몸으로 뛰어 들었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어 필름이 끊기기에 이른다는 주당들의 세계...
오늘밤 나는 다행히도 내가 술을 마신 경지에까지만 도달했다.
천정의 조명 불빛이 돌고
조명 불빛 아래의 무대 위 젊은 이들이 돌고
무대 아래에 선 술 취한 이들이 함께 돌아가는 세상.
오늘 밤 나는 그들과 함께 정말 망가진 모습으로 나이트 무대에까지 올라 섰다.
때로는 어쩌면 정말 술이 필요한 존재인가도 모르겠다.
그렇게 흥에 겨워 즐거워하는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이 다음에도 또 망가져 볼 것인 가 고민에 빠져 본다.
때로는 망가져 볼 필요가 있다는 걸 강하게 느끼며...
오늘 밤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 앞에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어떤 모습으로 망가졌는지 궁금하시다구요???
*노래방에서...:탬버린 들고 이주일 춤부터 이정현 춤까지 총 망라하여 리사이틀...
때론 스트립 댄서의 섹쉬댄스도 보여 줌...ㅠ.ㅠ
(그래도 머리에 화장지는 두르지 않았음)
*나이트에서...:테크노부터 부르스까지...댄서 춤 모두 복사하여...;;
(그래도 손가락에 호일 끼워 이정현 흉내는 내지 않았음...^^)
처음으로 나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된 남직원들의 반응이 어땠을지...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