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부터 컴퓨터를 차지하고 앉은 둘째한테 밀려
대목 밑에 초우 형님이 선물로 주신
‘사철나무 붉은 열매’ 란 책을 뒤적였습니다.
지난 해 영남수필에 당선되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형님의 명경지수와 같은 심성을 오래 지켜봐 온 터라
꽃단장을 한 책을 만나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더구나 책 표지의
적당한 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토막글이
아줌마닷컴의 초우 형님 글이었습니다.
{밤이 이슥해 모깃불의 연기가 실낱처럼 여위어질 쯤이면
아버지는 무릎 위에 껑충 올라간 뻣뻣하게 풀 먹인 무명 속옷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옷은 모두 벗으셨다.
산골의 밤이 깊어지면 기온은 뚝 떨어진다.
우리는 잠결에도 홑이불을 당겨 덮는데 아버지는 어째서 밤마다
그 시간에 옷을 도로 벗으시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주 나중이었다.
“그래야 모기가 너거는 안 물 거 아이가.”
아버지는 당신 몸을 밤새 모깃불 대신 지피고 계셨던 것이다.
......
아버지란 돌아가신 다음에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던가.
이제 나는 그 분이 사신 세월만큼 살았고, 우리들 가슴에 심은 무서운 아버지 상 또한
딸들을 올곧게 키워내기 위해 당신의 몸을 태운 모깃불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깨달음은 이렇듯 완행으로 오는 것인가?
나는 아직도 모깃불 연기만 보면
목젖이 따끔거린다.}
식구들을 위해 그 몸매로 모기를 유혹하려고 최대한 노출을 하고 길게 드러누웠다니,
나이를 초월한 순수한 감성의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길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해거름에 삼만 원을 들고 알싸한 겨울바람을 쐬러 나갔습니다.
비타민 C 한 통, 치간 칫솔, 꽃게조림, 어묵 두 개를 사먹고, 아이들 먹일 김밥 이인 분,
그리고 마지막에 꼭 가지고 싶었던 책 한 권을 샀습니다.
오며 가며 서점에 기대어 얼추 다 읽은 거였지만
'너무 멀리 와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날들에 대한 기록' 이란 매혹적인 사설과
시간이 흐르면 점점 희미해져 갈 내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팔천 구백 원인데 남은 돈이 팔천 팔백 칠십 원, 쭈뼛쭈뼛
야무져 보이는 카운터 아가씨에게 다가가 "삼십 원이 모자라는데 그래도 파실래요?"
수월하게 '그러마.' 하기에 십 원짜리까지 탈탈 털었습니다.
히죽히죽, 요즈음 제일 뜬다는 와인세대(46세~65세)에 걸맞게
그윽한 나만의 취향을 위해 돈을 지출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졸지에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털이가 되긴 하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