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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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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마저 버리고싶진 않다


BY 이쁜꽃향 2004-01-13

어젯밤부터 한 방울씩 나풀나풀 내리던 눈이 새벽내내 내렸었나...
아침에 일어 나 창을 통해 바라 본 바깥 세상이 온통 설국이다.
깜짝 놀라 뉴스를 들어 보니
이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한다.

대설주의보라...

어젯밤 부부동반 모임이 있어 놀다 보니 자정이 지나 한밤중에야 귀가하는 바람에
지하주차장에 빈 자리가 없어
길바닥에 차를 세워 둔게 뒤이어 기억되었다.

흐미...
차가 완전히 눈 속에 파묻혔겠네...
늦게까지 나를 잡아 둔 남편이 미운 생각이 들어 툴툴거렸다.
'어젯밤에 늦게 온 통에 지하에 차를 세울 자리가 없어 못 세웠잖아...
이그...또 어떻게 눈을 털어내구 나가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은 이미 댓자는 나와버렸다.

무언의 불만의 표시이다.

'나가면서 수족관 옆에 있는 털개 하나 가지고 가.
그걸로 살살 털고 가지 그래...'

누구는 그렇게 할 줄 몰라서 그러냐...
추운 데 서서 눈 털고 있으면 쪽팔리니깐 그렇지...
손 시럽고 귀찮으니깐 그렇지...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볼 거니깐 그렇지...
저 여자는 얼마나 늦게 들어왔으면
주차장에다 차 못 세우고 길에다 세웠을꼬...하고 생각할 거 아냐...

일어나기 싫어 뭉그적대는데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아들넘 학교 가는데 굶겨보낼 순 없어
마지못해 일어 나 주방으로 향한다.
눈을 감상하는 건 좋아하는데

눈 내리는 건 정말 좋은데
내 차에 눈 쌓이는 건 정말 싫어...

아들녀석 아침을 챙겨주면서
오늘 해야 할 스케쥴을 머릿 속에 쫙 그려본다.
아무리 대설주의보가 내렸다한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똑 같은 스물네시간...
내가 할 일도 하루 뒤로 미룰 수는 없는 것...

화장대 앞에 앉아 대충 기초화장만 하고 립스틱을 바르며
눈가에 혹시 늘어 난 주름은 없는가 한 번 드려다 보고
핸드백 점검을 하는데 오리털파카 차림으로 남편이 들어온다.

???
언제 밖에 나갔었나...?

아무래도 밖에서 들어 오는 폼이다.

옷 군데군데 눈이 녹은 듯한 자욱도 눈에 띈다.
"차 눈 털고 왔어.
조수석에 털개 놓아뒀으니까 쓰도록 하지..."

잉??

뾰루퉁해 있던 마음이 금새 미안함으로 바뀐다.
추운데 마누라 불편할까 봐
어느새 나가서 눈을 털고 들어왔나 보다...
"고마워..."
모기만한 소리로 남편에게 마음의 소릴 던지고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역시...내 남편이야...라는 소리는 이미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 버렸다....

아침 먹고 가라는 걸 평소대로 거른채 서둘러 나서는데
뒤이어 들려 오는 남편의 목소리...
'그냥 D에다 놓고 가다가 다른 차들 서행하면 천천히 조심해서 2단으로 가...'

다른 덴 겁이 많으면서
눈 오는 날 운전하는 데엔 별로 겁이 없는 나...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눈 오는 걸 보며 드라이브하고 싶어 위험을 감수하고 운전대를 잡는다.
빙판길에 습관적으로 살짝 브레이크를 밟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드듣드드드드...ABS브레이크가 들어가는 모양이다.
발바닥에 쥐가 날 지경이다.
아하...이래서 눈 오는 날 사고가 많은 건가 보구나...

차가 내 마음대로 가 주는 게 아니라서...

조심조심 차를 달래가며 무사히 출근했다.

'아니...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차 안 가지고 오시던데...
직접 운전하고 오셨어요?'
아들넘 초등학교 친구인 공익이 깜짝 놀라서 나와 차를 번갈아 살핀다.

이 정도야...뭐....

빙긋 웃고 차에서 내리는 여유로운 내 표정과는 달리
등골에 흐르는 식은 땀은 어찌할 수 없다...
흐미...다음엔 정말 조심해야쥐~

"아니~언니!!

아직도 사춘기 소녀유?

겁도 없이 차를 가지고 나가셨슈??

또 눈 보고싶어 드라이브하신답시고 가셨구랴?"

깔깔대며 웃는 후배의 전화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대꾸를 하며

수화기를 놓는 마음이 과히 즐겁지만은 않은 건 나이를 의식한 탓인가...

 

흰 눈을 맞으며 거닐고 싶은 마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드라이브하고 싶은 마음 모두가 낭만일 뿐이란 말인가...

이 나이에 낭만을 즐기고자 함은 가당치도 않은 노망이란 말이던가...

나이 먹는 것도 서러웁거늘

마음마저 녹슬고 싶지않음은 낭만마저 포기하고 싶지않음은

아직도 내가 철딱서니가 없어서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도 하얀 눈을 바라보며

친구들에게 안부 메일이나 모두 보내야겠다...

아름다운 설경을 글 속에 담아... 
아직은 결코,

절대로 낭만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