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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빨리 재혼해


BY gasdung 2003-11-03

 

 

문단과 예술계에 금실 좋기로 유명한 원로 소설가 "한말숙씨"가 문예지에 실었던 가
상 유언장이 화제가 되었다 한다. 부의금을 받지 말고 묘비는 대리석을 쓰지 말고 야
트막한 단단한 돌로 만들라는 소리와 함께 가상이 아닌 실 지처럼 가족에 대한 세심
한 마음 쓰임새가 조목조목 나타나 있었다. 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 점 미련없이
세상을 떠난다는 묘비명에 콧날이 시 큰거리다가 시선이 멈춘 곳은 "너희 아빠의 재
혼은안 된다" 라고 한 점이다. "아빠는 손이 안 가는 분이시니까 너희 중 여건이 맞는
애가 아빠 가까이에서 살면 된다." 에서는 '왜?' 였다. 다른 이의 손길이 필요없을 만
큼 깔끔한 삶을 살았다지만 손이 안 간다 해서 자식의 손길 아래 여생을 마쳐야 하
는지, 너무 사랑해서, 너무 사랑 받아서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안됀다는 것일까? 하
지만, 금실이 좋은 부부일수록 재혼의 확률은 높다는데.


몇 해를 두고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세간 살이를 정리하며
갈 때마다 사라지던 그릇들이 아까웠다. 차곡 차곡, 쓰지도 않는 그릇들을 재어 놓
던 어머니의 마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찬장 속의 그릇들을 꺼내어 박스에 옮기며
왜 그릇들을 싸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다락에 올려 놓을 거여요. 자꾸 없어지니
까 기분 나쁘지 뭐여요." "느그 엄마 그냥 아랫목에 누워 있기만 해도 좋았는데.."
어머니가 아파하며 누워 있던 아랫목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번지던 쓸쓸한
미소에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때, 왜 난 그릇을 싸고 있었던지...아버지가 다시 재
혼 하지 않기를 바랐는지, 아니면 재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라 생각을
했는지...아마 후자에 속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병원과 온 동네
에 파다할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재혼을 하셨다. 무덤 위를 덮은 잔디 아직
자라지 못해 벌건 흙을 드러내고 있는데 아버지는 새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다. 냇물이
넘쳐 벌건 흙탕물이 도로를 덮을 때, 게울진 가장자리에 서서 까닭 모를 눈물로 통곡을
했다. 마치 떠나간 어미 무덤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울어대던 청개구리처럼 빗소리에
맞춰 오래 울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어서. 흙이라도 마르면 재혼을 하시지
그리 좋다 할 땐 언제고,그리 절절이 울어 가슴 터지게 할 땐 또 언제고 이러나 싶어서,
믿지 못할 사랑에 다시 울었을지 모른다. 지금에야 백 번 잘하셨다는 말로 당신의 행복
한 말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아버지의 이른 재혼은 오랫 동안 서먹한
마음으로 두 분을 바라 보게 했다. 정작 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옆에 서 따뜻한
밥 한끼, 당신이 그리워하며 눈물로 지샐 긴 긴 밤에 불빛조차 밝혀주지 못하면서, 뵐
때마다 눈물에 젖던 당신의 눈물 한 방울 닦아 주지 못하면서 당신에 대한 섭섭한 마음
으로 응어리 져 있었다.


그릇을 싸면서도 아버지가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런 사랑...흔하지 않기 때문에, 금실이 좋았던 사람일수록 재혼을 빨리 한
다는 말을 증명이나 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늦은 신혼을 즐기셨다. 가슴 속에 어머니를
끌어 않았는지, 묻었는지 모르지만 재혼 후 아버지는 걱정 근심거리 다 풀어 놓은 사람
처럼 행복해 보였다. 오죽하면 큰 올케가 "고모, 어무이는 아버님 꿈에도 한 번 안나타
나시나 몰라." 라는 말로 섭한 심정을 대신했을까? 우린 그렇게 이기적이었다. 당신의
그 깊은 외로움, 서러움은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우리 곁에서 어머니만 생각 하며 눈물
젖기 만을 바랐는지..떠난 어머니의 빈 자리를 새어머니가 환하게 채우고 있었지만 내
가슴 속엔 이미 느끼지 못한 그림자가 켜켜히 쌓여 울음을 주고 있었다. 두고 두고 내
가 불러 언제든 찾아 오는 서러운 그림자로 자리한 채...


영원이라 생각하던 사랑도, 망각앞에서는 허무한지. 접시 꽃 당신이라는 애절한 시로
가슴을 울렸던 그 시인도, 죽을 때까지 아내를 놓지 않았던 가수도 재혼해 행복하다며
구절구절 지면을 채울 때 느끼던 쓸쓸함, 실연과 더불어 찾아 오던 치유의 상처들은 조
금 씩 아무라지고 사라져 빛 바랜 사진 속에 얼굴로 아스라이 존재할 때 찾아 오는 또
다른 사랑,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새울 깊은 밤보다는 따뜻한 체온이 숨쉬고
알콩달콩한 말들이 살아 있는 뜨거운 밤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침묵으로 아버지의 재
혼을 못마땅해 하던 자식에게 "이것아 강새이도 잘해주면 꼬리치고 좋다 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라는 말로 새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자식에 대한 무안한 마음
을 대신 했을 것이다.


사랑에 상처 받으면 부여잡을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데, 우리에겐 영원한 사랑이란 없는
것 일까? 내가 당신에게. 남길 유언장을 쓴다면 어떤 말로 대신할까? 나를 잊지 말라구,
그래서 당신도 재혼을 하지 마라고? 온통 손 가는 거 투성인 양말조차 찾지 못할 당신은
자식에게 눈물만 줄 사람인데, 그러니 꼭 당신만 쳐다보고, 꼭 당신만 위하여 하루를 살
아가며 서늘한 마누라 대신 앵무새처럼 종알거려 보릿자루 같은 당신의 마음을 녹여줄
그런 사람과 빨리 재혼을 하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