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하기에 딱 좋은 날씨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 말에 난 차창밖을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두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 보았다.
그래,적당히 흐리고 적당히 맑은 하늘이네.
여자친구 넷이서 북한산에 가기로 몇주일전부터 약속을 했다.
의상봉까지 가자고 했는데 한 친구는 다리를 좀 다치고
한 친구는 생리를 하는 날이라서 간단한 코스로 바꾸기로 했다.
한편으론 올커니 잘됐다고 좋아한 걸 아는지...
왜냐면 몇달만에 산에 오르려니 의상봉까지 갈 자신이 없었거든....
산 초입엔 계단식 논이 있었고
논두렁 가운데엔 "받들어 총"하는 자세로 군인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옛날 허수아비는 헌 옷을 입고 밀집모자를 썼는데
요즘 허수아비는 파는 인형을 사다가 나무에 붙들어 매서
논두렁이나 밥두렁 바닥에 꽂아 놓을 걸 보았는데
이젠 한 차원 넘어서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총까지 들고 있는 군인 허수아비도 있다니
너무 삭막한 거 아니냐며 친구들과 한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래도 논두렁엔 개여뀌가 피고 산부추꽃이 살고 이름모를 잡초도 무성했다.
황금들판이라더니 익어가는 벼는 그 옛날 표현 그대로 눈부시고 찬란한 황금색이었다.
산씀바귀꽃이 바위틈 사이로 노란얼굴을 내밀고
꼬들빼기 꽃은 연노랑색으로 지나가는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나도 빤히 쳐다보며 아는척을 했다.
"저 꽃이 꼬들빼기야."
오늘의 산행 코스는 여성봉에서 잠시 쉬고 오봉까지 가야한다며
한 친구가 명령 비슷한 명령을 했다.
우린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 일단 여성봉을 향해 힘겹게 헥헥이며 올랐다.
마음은 18살인데 몸은 노인네같은 나.
나와 새벽이 오도록 컴에서 수다를 떠는 친구는 작년만해도 나보다 산을 못 올라갔는데
요즘 헬스도 다니고 바위산을 많이 타더니 날 이겨먹고 있었다.
할아버지 세 분이서 반바지 차림으로 뛰어서 산을 내려가는데
난 산초입부터 지쳤다.
에고~~마흔이 넘어서고부터 한 해 한 해가 틀리다.
아니, 겨울 다르고 봄 다르고 여름 다르고 가을에 또 다르게 몸이 늙어가는구만.
어쨌든 여성봉까지 갔다.
그리고 나무그늘에 신문을 깔고 앉아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오봉이고 칠봉이고 열봉이고 다 치우고 여기서 하산하자고 결단을 내렸다.
여성봉 가는 중간쯤 바위에서 오이 으적으적 씹어먹고,
여성봉 입구에서 포도 쪽쪽 빨아먹고
여성봉 아래서 젊은 산여성의 정기를 받으며 김밥 아작아작 먹고
즉석국수 뜨거운 국물 훌훌 마시고
커피랑 빵 한 쪽씩 낼름먹고
남성봉이 있음 그 봉을 기필코 정복하려 했지만
친구들은 남성봉은 집에 있으니까 집을 향해 가자며 으쌋싸~~산을 내려왔다.
시간은 오후 한시를 좀 넘기고 있었다.
그냥가기 아쉬워 도토리묵이나 파전을 먹을까하다가
다들 점심먹은지 얼마안되서 배가불러~~하더니
산에서 나를 앞질러 간 친구가 "진관사에 있는 찻집가자?" 했다.
날 이겨 먹어서 얄미웠는데 찻집가자 하는 말에 반전이 되서 친구 팔짱을 끼며
"그래, 거기가자.거기 분위가 정말 끝내 줘."
하늘은 아침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맨드라미 꽃밭에선 맨드라미꽃밭 주인이 맨드라미를 팔았고
정열적인 맨드라미를 한아름 안고 좋아하는 여자옆엔 뿌듯하게 웃는 남자가 있었다.
우린 넷은 또 한마디씩 했다.
"좋을때다."
"마흔 넘어봐라.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
"부럽다아~~"
"맨드라미꽃 안겨주는 애인 어디갔냐~~?"
산사에 있는 찻집에 앉으니
산사 음악이라는 것이 머리속에 복잡하게 있던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어 차분하게 가라앉게 했고
솔잎차 한 잔은 끌어안고 있던 과거의 날카로운 칼날을 뒤로 쓰윽 밀어 감추게 했다.
찻집 창가에 살고 있는 나무.꽃,돌담은 잠시 접어야했던 꿈을 다시 꾸게 했다.
모두 자신에게 맞는 팔자대로 살아야함을 안다.
순리대로 살고 있는 우리 친구들은 벌써 가을이라는 계절을 닮아 있었다.
산을 내려오며 수채화 그림같은 단풍잎을 한 잎 따서 친구 책갈피에 꽂아줬다.
" 너무 예쁘지?"
"응...코팅해라."
그래, 코팅하고 싶다.
산자락,단풍든 바위,들꽃,추억,사랑,우정,논두렁,황금빛 논,노랗게 물들 던 커다란 나무,
찻집,산사음악,창가 풍경......
모두 코팅해서 추억의 책갈피에 갈피갈피 넣어두고서
먹고 사는 것이 고단할 때나
혼자라서 울고싶을 때나
아이들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나
과거라는 것에 둘러싸여 억울한 나 자신을 볼 때나
믿었던 사랑이 뒤돌아 싸늘해 질 때,
한 개씩 두 개씩 서너개씩 꺼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