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어찌 하다보니 의료 보험료 3월분과 4월분이 연체되었다. 독촉장이 날라와서 은행에 갔는데 3쪽으로 되어있는 영수증의 가장 중요한 1쪽(아마 은행에서 공단측으로 넘기는 것인듯)이 없어져서 수납할 수 없단다.
그래서 보험공단에 연락하여 전후설명을 했더니 무통장 입금을 시키라고 했다. 오늘 아침 부랴부랴 은행에 갔는데 20 명 쯤 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휘익~ 뽑아든 내 번호표는 44번.
뿌뿌(강아지)는 내가 외출할 준비를 하면 아예 문앞에 딱 버티고 앉아있는다. 나 혼자 나가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집 앞 주차장에서 들릴 정도로 낑낑 거린다. 고로 번거롭지만 동반 외출을 할 수밖에.
번호표를 뽑아든 나는 뿌뿌를 어깨에 얹어놓고 여성지를 부지런히 보기 시작했다. 명세빈이 결혼하려다가 말았다는 얘기, 유승준의 장인이 얼마 전 자살했다는 얘기, 그리고 아이 둘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자살한 주부의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뉴스에 보도된 바와는 달리 그 남편은 가출한 것도 아니고 그 여인은 비정한 엄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은 내내 집에 있다가 며칠 전에 지방으로 날품을 팔러나갔고 속 깊은 아내로부터 힘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해 부부가 모두 신용불량자인데도 아내가 빛독촉을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단다. 여성지 기자가 본 남편은 성실한 가장이었다.
나는 그 슬픈 이야기에 깊이 깊이 빠져 버렸다. 엄마이자 아내인 한 여인이 겪었을 고통이 도통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또 이제 겨우 34살이라는 그 남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언론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실을 마구 날조해서 한번 죽은 사람을 두번 죽이는 걸까.
"이 강아지 안 물어요?"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슬픔에서 끌어냈다.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니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깜찍한 용모라고 보아줄 수도 있는 아가씨. 덕분에 후다닥 정신 차리고 보니 조금전까지 들고 있었던 번호표가 없지 않은가.
창구에서는 34번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어디 갔나. 나는 책장을 뒤지며 명세빈을 다시 보고 유승준을 다시 보고 슬픈 얼굴을 다시 보았다. 없었다. 지갑을 뒤졌다. 없었다. 여성지의 등을 잡고 마구 털어보았다.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없었다.
얼마나 찾았을까. 44번 손님~ 창구에서 부른다. 비록 번호표는 분실했지만 난 엄염히 44번 손님! 뿌뿌를 챙기며 주춤주춤 창구로 다가가는데 내 옆에 있던 아가씨가 나보다 빨리 휘잉~ 하니 창구로 간다.
창구 앞에 서자 이미 행원이 그녀의 용무를 처리하고 있는 중이엇다. 어리둥절하고 어벙벙하게 서 있자 아가씨가 물었다.
"혹시 번호표 잃어버리셨어요? 제가 주웠는데 ~~~ 잃어버리신 건 줄 모르고~"
"아~~ 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어벙벙하게 구는데
그녀는 내가 전표와 돈을 담아놓은 접시를 행원 앞으로 밀어넣었다. 행원은 그녀에게 통장을 되돌려주고 나를 보며 말햇다.
'번호표 주세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재빨리 나서서 여차여차하여 여차여차하게 되었으니 이 분것도 그냥 처리해주시죠? 하고 말끝을 싹~ 올리는 것이었다. 행원이 돈접시를 자기 앞으로 당기자 그녀는 내게 싱긋 웃음으로 인사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뒤에야 나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우물우물 거렸다.
아니, 내가 바로 옆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찾았는데 내가 떨어뜨렸다는 걸 몰랐단 말이지 .....
행원은 나를 힐긋 보았다. 어벙벙한 아줌마 구경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