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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17) *이렇게 좋은 날엔......*


BY 쟈스민 2001-09-11

어느새 빨갛게 익은 사과를
입안 가득 베어 무니
그곳에도 가을은 있다.

아직은 약간 설익은 맛이지만
뽀얗고 탐스런 과육은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지난 여름의 한낮 땡볕을 무던히도 견뎌내고
비바람 맞으며 굿굿이 자라나
이제 우리앞에 고운옷 갈아입고 환하게 와 있는
달디단 포도 송이에도.....
빨간 사과 몇알에도.....
가을은 녹아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다른 바람을
달디 단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어
서성이는 시간을 늘려 보기도 한다.
살아있어서 가질수 있는 행복을
가슴에 한가득 안아본다.

그런데 9월의 하루 하루는
너무도 아쉽게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

가족 모두가 여름을 잘 날수 있게 해준
여름 옷가지들을 정리해야 하고
뭔지 모를 설레임으로 어수선해진 집안 곳곳에
나의 숨결을 불어 넣어야 겠는데......

어디서 부터 해야 하나
마음은 앞서가고
게으른 나는 저만치서 느린걸음을 재촉한다.

눅눅함이 묻어 있는 이부자리도 이젠
새로운 분위기를 내고 싶고.....
커튼도 달아야 하고.....
지난 여름 키가 한뼘이나 자라난 아이들에게
가을을 입힐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해야할 일들이 그토록 나를 기다리고 있건만
서둘러 일손이 잡히지 않는 까닭은
정녕 시간이 없다는 탓은 아닌것 같은데......

계절을 앓고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느새 따스한 조명등 아래 앉아 있는 시간이
나를 편안하게 하고
커튼 한자락으로 서늘한 새벽바람 막아
아늑한 온기를 맞아들이고 싶어지는
계절이 오고 있는 탓이겠지.....
함께 있어도 조금쯤 쓸쓸해지는 탓이겠지.....

두시럭(?) 떨기 좋아하는 나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계절은 벌써 저만치 와 있는걸
모를리도 없건만......

멍하니 앉아서 음악 듣기 좋아하고
자주 생각에 잠기느라 잠깐 잠깐 무엇인가를
잊어버리는 시간이 차츰 늘어만 가고
해야할 일을 곧잘 미루어 두곤 한다.

이제 떨구어 내야 할 것은 떨쳐내고
맞아들여야 할 새로운 계절이 무르익고 있으니
나 또한 그 세월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아야겠지......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할일을 두고서 잠자리에 들지
못하던 다분이 극성스런 나는 어디로 갔을까?
잠자는 나를 깨워야 할 시간인 게 분명한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비온뒤의 하늘은 참 맑기도 하지.....
이런 날에.....
바람 좋은 이런 날에
내가 집에 있다면
너무 너무 하기 좋은 일들이 많을 텐데.....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익숙하지만
내가 잊고 지내던 오래된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서 차곡 차곡 서랍정리를 해도 좋을 듯 하고

뽀얗게 빨래를 삶아 널어 싱그런 바람 냄새를 그대로
맡아 보아도 좋을 그런 하루였겠지......

어떤이는 직장엘 나오면 소소한 집안일을 조금쯤은 등한시
할수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늘 해야 할 일을 두고 나와 있어 마음이 조금은
찜찜해 하며 살아 가지......

하루 쯤 집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길게 받아 들이고
마루에서 뒹굴거리며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들으며
느긋하게 하루를 접어 보며 해저물녘까지 그렇게
마냥 있어보는 일을
나는 언제쯤 해 볼 수 있을 까......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더듬으며
마음으로 그네들의 옷에 남은 주름을 펼수 있는
손길 고운 엄마의 모습이
내겐 왜 이렇게 쫓기면서 겨우 겨우 해내야 하는 일들이
되고 마는걸까.....

때때로 무언가
잘못살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회의에 젖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내 앞에 놓여진 다리들을
나는 오늘도 건너고 있다.

나의 손길이 바빠지는 날에는
싱그런 풀냄새가
내 사는 공간에 솔솔 풍겨났음 좋겠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신고서 누군가가 찾아온다 해도
아무런 마음의 부담도 없이 문을 열수 있는
그런 나로 살고 싶다.

내가 사는 집에는
나를 담고.....
가을을 담고.....
이렇게 좋은 가을바람을 담아내어

지나가는 누구에게라도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
선뜻 말건네어 볼수 있게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거다.

이렇게 좋은 날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