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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코알라 살처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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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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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야기---3


BY lina33 2003-06-10

처음으로 해보게된 김장은 그런대로 맛있다는 평을 듣게되었다.
정말 맛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과찬인지는 알수없었지만,..

그런 일이 있은 얼마후 시어머니는 내게 2만원을 주시면서 방앗간에가서 콩을 20되 사고 메주를 만들라고 하셨다.

이게 웬말인가 해서 어안이 벙벙한채로 아무말도 하지못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보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나는 한마디도 하지못하고 돈을 받아들었다.
한참이 지난후 까지 나는 무슨말인지도 몰랐다. 메주를 가끔 어린시절 시골에서 자랄때 어른들이 하시는것은 보았지만 그것은 그냥 어릴때의 어렴풋한 기억에 불과했던것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다 결국은 시골에 계신 친정어머니께 전화를 드릴수 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친정 어머니의 목소리에 그 죄스러움과 미안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딸낳은게 죄인이지" 하시면서 메주를 만들어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시간이 흐르고 그 후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시어머니는 나보고 메주를 만들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빙글빙글 둘러서 결국은 친정에서 만들어 오도록 하시려고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순진한 나는 나보고 만들어라고 하신줄알았던 것이다.
메주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몇개월후 서울로 배달되어왔다.
나는 시어머니가 메주를 원할때는 당신이 간장과 된장을 담을수있는 능력이 있으신줄 알았다.
메주가 왔다고 알렸더니 나보고 간장과 된장을 담으라셨다.
이게 또 웬말인가?
당신은 담가보지않아서 모르신단다. 그렇지만 며느리를 보았으니까 여태까지 얻어먹었던것을 갚아야한다고 하셨다. 된장과 간장을 ,..
이때부터 나는 화가 나기도 오기가 생기기도 하였다.
친정어머니께 전화를 걸고 시키는데로 따라했다. 그렇게 하여 메주를 담았고 간장과 된장을 분리하였던일, 그런후 그 간장과 메주를 이집 저집 다 나눠주셨던 일들,...
겨울이 되었고 구정이 가까왔을 무렵이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어 구정때 친정을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시어머니의 말씀인즉,.." 친정은 복사꽃이 필때 가는것이란다." 구정때는 나랑 외가 시골 친척들집을 돌아보고 오자" 하셨다.
친정을 복사꽃이 필때 가야한다니 지금이 조선시대란 말인가?
할말을 잃었다. 말해봐야 소용이 없겠거니하고 구정때 우리는 강원도 오지마을의 시어머니 먼 친척집과 시어머니 사돈집(?)등등을 돌아왔다.
어딘가에 다니기 좋아하시는 시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촌수도 잘못짚어 실수를 하기도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언니 오빠 (?) 뭐 이런 호칭으로 부르셨다.
당시의 내눈엔 솔직히 정말 희안하고 몰상식한 행동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촌수는 상당히 중요한것이고 촌수에따라 호칭과 행동이 달라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것들을 상당히 중시여기면서 자라왔던 탓이다.


시집을 왔을때 시어머니댁에는 시어머니, 남편, 나, 그리고 시누와 시누의 남자친구 이렇게 5명이 살았다.
이해 할수없었던 한 부분이다.
남편은 시누를 함부로 나무라지 못했다. 왜냐면 남편은 시누의 친 아버지로부터 많은 학대를 받았고 만약 시누를 나무라거나 야단치면 자신이 복수하는 느낌이 들기때문이라고 했다.
이복동생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누는 22살이었다.
먹고 놀고 돌아다니고,.. 그게 모든 생활이었다.
시어머니는 어떤 일이건 시누를 감쌓고 어느 누구도 그 벽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얼마후 시어머니는 시골을 다녀오시면서 2명의 여자아이들을 데리고오셨다.
시어머니의 조그만 공장에서 일을 할 아이들이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따라온것이었다.
때문에 식구는 어른만 7명이 되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내가 잠자는 시간은 새벽1~2시,..
세탁기를 마련해오지않은 죄로 나는 손빨래를 새벽까지 하기도 했다. 손끝이 다 닳아 피가 나기도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자들이 많으니 아침마다 샤워에다 머리감기 등등 수건만해도 아침에 7
~8개씩이 나왔다. 낯시간에는 남편이 운영하는 작은 공장에서 나도 도와야할것 같아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저녁 준비를 하고 빨래를 해야만 했던 까닭이었다.
나는 미쳐버리는것 같았다. 이 생활을 내 견뎌낼수있을것 같지가않았다.
아무리 남편보고 시집을 오고 남편 사랑을 먹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린 신혼도 없었고 들어오던 순간부터 나는 전쟁을 치르고있는기분이었다.
위로를 아끼지않는 남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뚜쳐나가고 말았을것이다.
시누와 나 사이는 이미 상당히 거리가 멀어져있었다.
설겆이 하기싫어 밥그릇에 쿠킹호일을 씌워 밥을 담아먹는것을 보고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담배피고 소주마시고,.. 남자친구랑 한방에서 생활하고,.. 이런것을 보고 묵인하는 시어머니도 남편도 이해할수없었다.
후에 남편은 그당시 자기가 묵인했던 이유는 자신이 그 일로 시누이를 나무라고 시어머니와 맞섰다면 같이 살지도 못했고 나의 삶이 더 힘들어졌을거라고 했다.
보수적으로 자라온 나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여자들이 많이 살다보니까 속옷들은 많았고 이런것들을 말리는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나는 항상 이런 속옷들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않게 말리기를 원했다.
빨래건조대에 말릴때면 그 위에 얇은 천을 덮어놓거나 얇은 옷을 걸쳐놓기도 하고 이렇게,..
그런데 이런 나의 제안들은 콧방귀를 뀌게 했다.
별간섭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빨래 건조대가 거실에 있었기에 내 남편을 위해서도 손님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던것인데,..
시어머니는 당시 빨간 속옷을 좋아하셨던지 주로 빨간색이었다.
시누도 시어머니는 화장실에 이곳 저곳 못을 쳐서 걸어 말리셨다.
세수하면서 씻어 걸어놓고 샤워하면서 또 바로 입을수있으니 편리했을것이다.
이건 나로서는 결코 볼수없는 광경이고 용납할수없는 광경이었다.
화장실이 2개도 아니고,.. 아무리 부모형제할지라도 ,...
고민끝에 화장실 벽에다 A4용지를 이용해 걸지말것을 부탁하는 글을 적어 부쳐놓았다.
어느날 아침 모녀는 나 들어란듯이 화장실에서 내가 적어놓은 내용들을 웃으면서 합창을 하고 있었다.
그런일이 있은후에도 그 습관은 잘 고쳐지지않았고 나도 이런것들을 고치게 한다는것 자체를 포기했다.
결국 사람들은 살아온대로 살아가는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시집오고 몇개월후 시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재혼을 하셨기에 아들이 셋이 있고 부인이 계셨다.
우리집에 시어머니랑 오셨다.
다정하게 보였기에 이혼후에도 좋은 관계로 지내는것이 보기좋았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시아버지를 뵙게되었고 그 후로도 몇개월 한번씩 뵐수있었다.
결혼 몇 주 전까지 사실은 나는 시어머니의 이혼 사실도 시아버지가 살아계시는줄도 몰랐다.
첨에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 그 뒤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고 남편도 언급하지않았다.
결혼식을 앞둔 즈음에야 비로서 남편의 이름과 성이 다 바뀌었고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알았던것이다.
그때의 혼란은 지금 생각해도 당황스럽다.
결국 친정에 비밀로하고 결혼을 했던것이다.
이럭저럭 혼란스런 생활이 1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