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3)- 배구공과 탁구공 그리고 자유
여자 40대를 공으로 표현한다면, 배구공. 왜냐면,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으니까. 여행길
에 TC에게 들은 유머다. 연령별로 공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10대인 우리 딸들은 탁구공이
란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과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배구
공, 그리고 아직 덜 익은 아들과 시작한 여행. 혹자는 돈이 얼마나 많으면 해외여행을 가느
냐고 생각할 것이었다. 나에게 지난 10년간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남매중의 맏딸로 어
머니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나보다 세 살 연상의 여인과 재혼한 아버지, 그리고 연이은 아
버지의 죽음, 동생의 사업이 흥과 쇄를 반복하는 동안 그들 부부 사이에 벌어진 문제들, 아
버지가 남겨놓은 빚, 그리고 부도난 저금통장, 10년간의 세월은 내 얼굴에서 젊음과 희망을
앗아갔다. 그리고 흰머리와 지친 두 어깨 위에 무거운 짐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분명 탈
출구가 필요했다. 성격상 사람들과 어울려 나이트클럽이니 노래방 같은 곳에서 속 안의 울
화를 풀어낼 수가 없었으니 그저 위안이 되는 것은 수다였다. 그것도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는 가능하지 못했고. 일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여행을 위한 저축을 한 이유도 밖으로 분
출되지 못한 내 안의 꿈 많은 여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눈물이 필요했고 기댈 어깨가
필요한 여자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내게 부딪친 첫 번째
문제는 넉넉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며 해외여행의 경험이 누적된 베테랑 여행자들과의 동
행이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은근히 걱정거리가 되었고, 아이들이
라고는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교 5학년의 남자애, 부모와 함께 온 초등학생 6학년 여자애와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전부였다. 세명의 아이들을 혼자 데리고 온 40대의 소심한 배구공은
바람 빠진 것처럼 위축부터 되는 것이었다. 버스 맨 뒷좌석에 터를 잡고 앉은 이유도 아마
도 그런 위축감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베를린은 넓은 숲과 호수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히틀러가 잘한 일이 있다면 도
심에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이라던데 도시 한가운데 쭉쭉 뻗은 활엽수들이 하늘을 반쯤 가리
고 있으며 오래된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운치를 더해주었다. 베를린은 통독이 되기 전에 동
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동베를린 쪽은 공산주의 치하에 있었던 터라 아
파트건물이 많고 집 모양도 단조롭다. 우리가 도착했던 날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동베를린
지역의 주택가는 적막하기까지 했고 다니는 사람 역시 극히 적었으며 그나마 볼 수 있는 사
람들은 주로 노년층이었다. 동베를린의 중심지인 알렉산더 광장에는 러시아풍의 건물들을
볼 수 있으며 그곳을 중심으로 운터 딘 린덴 거리를 걸다보면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그 성
문과 마주하게 된다. 노동절 행사나 대형 행사를 치룰 때 늘 이용되었던 브란덴부르그는 바
하의 '브란덴브르그 협주곡'으로 귀에 익은 건물이다.
카이저빌헬름 교회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그들 과오를 잊지 않기 위해 그 건물의 보수를 포기했다고 한다. 아
름다운 건물이 전쟁의 참화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각오
를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카이저빌헬름 교회를 관광한 후 우리에게는 세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해외에 나가서 진정한 여행의 묘미를 맛본 곳이라면 그곳 베를린에서였다. 나
는 그 시간에 아이들과 서베를린 지역의 가장 번화한 거리를 걸으며 제과점에 들러 빵을 구
입하기도 하고 커피숍이 들러 핫초코와 커피를 사서 마시기도 했다. 지나가는 독일인에게
서툰 영어로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옷가게에 들러 옷을 구경하기도 하고 책방에서 책을 구
경하기도 했다. 자유, 구속이 없는 자유라는 게 이런것인가, 하는 느낌을 그토록 강하게 받
아본 적이 없었다. 선택에 있어서의 자유,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의무로부터의 자유, 그런 것
들이 내가 사는 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느끼다니…… 다시 그런 자유를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