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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산책


BY eh1004 2003-06-06

붉은 장미 넝쿨이 한창 우거져 기세가 위태로울 정도로 담장을 내려오고 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삐 살고 있기에 저녁 한때의 산책 시간은 언제나 소중하다.

며칠전 산책을 하다가 가끔이라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아파트 단지를 돌기 시작했다. 붉은 장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저녁시간. 내 앞에서 한 모녀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평범한 중년의 아주머니와 20대 초반 정도의 딸인듯 싶었다. 엄마보다 키가 큰 그 딸은 연신 엄마에게 무어라 중얼거린다. 그러다 갑자기 두 모녀는 까르르 웃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한 모습일진데 자꾸 눈물이 내려 어쩔줄 몰라하는 내가 다정한 모녀 뒤를 느리게 걷고 있다.


내게도 20대가 있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욕심이 많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아침 일찍 산을 오르셨다. 운동을 마치고 현관문을 들어설때부터 엄마의 노래소리는 시작되었다. 아침상을 차릴 때도 그랬고 설겆이를 할때도 노래는 계속된다. 학교에서 돌아와 내 방에서 논문을 쓸때에도 엄마의 노랫소리 때문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어쩌다가 노래소리가 나지 않으면 나는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와 엄마의 부재를 확인했다.

거의 매일을 운동하신다며 산을 오르시던 엄마는 내게 같이 운동하자는 말을 여러번 하셨다. 그래도 나는 한번도 같이 운동하지 않았다. 그것말고도 할일이 많다며, 퉁명스럽게 대했다.

때로 세월이 가져다 주는 진리는 늘 후회와 아쉬움을 함께 동반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이제는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기에 엄마와의 산책은 거의 할 수 없다. 저녁무렵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그 모녀의 모습이 너무도 부러워 눈물이 날 정도지만 쉽사리 엄마를 찾아 갈 수는 없다.
그 평범한 모습조차 눈이 시릴 정도로 아프게 다가오기까지 세월은 제법 내게 무게를 갖고 다가와 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엄마는 노래를 많이 잃어 버리셨다. 입천정 반쪽을 도려내고 보철로 살아가신다. 이제 그 고운 노래는 듣기 어려워졌다.
언제나 같이 있을 거라는 그 오만한 믿음때문에,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치는 어리석음을 오늘도 저지르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