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저녁때가 되니 전화벨이 울린다.
'에고고 시간상 아버지겠군..'
한잔 거하게 걸치시고는, 권희 바꾸라며 대뜸 소리부터 치신다.
15개월된 손녀가 무슨 대답을 한다구...
오늘도 아주 엉망으로 취하셨는가보다.
초점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머리카락 끝이 짜증으로 쭈빗쭈빗 서고 있다.
권희가 보고싶으시단다.
당장 오란다.
에고, 자식이 뭔지..
며칠 전 일나가신 곳에서
그집 손자를 보셨다더니 권희가 아른아른 하신가보다.
다음날 남편이 근무라 집에 안들어온다길래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갔다.
밤늦게 일끝나고 오신 엄마..
요새 일이 없다며 식당 나가신지 몇달째..
발바닥에 티눈까지나서 너무 아프시단다.
칠순 노인네처럼 삐쩍 말라서는...
주무시려고 누웠다가 잠이 안온다며
엊그제 군대간 동생이 휴가때 사온 홍주를 한잔 하신다.
불도 안켜고...
"너두 먹을래??"
"아니..."
"졸려?"
"아니, 얘기해.
집에서 누워 tv 보면 금방 말하고 있던 김서방 바로 코골거든.
tv보면서 얘기하다가 그렇게 혼자 잠들면
나혼자 늦게까지 tv보는데,
바로 잠이 안와서 한참을 뒤척이거든.
그렇게 혼자 자는 거 보면 어쩔땐 배신감도 느낀다니까.
엄마도 누우면 바로 잘테니까,
난 지금부터라도 잠이 오도록 애?퓸償?..
나 아직 안자니까 얘기해. 듣고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다,
"아빠가 술먹고 필름이 자꾸 끊기나보다"
"술먹고 필름 끊기는 사람은 치매가 잘 온데."
난 누워서 눈도 안뜨고 대꾸했다.
그리고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
'아~ 이러다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고,
아빠 혼자 남았는데 치매라도 걸리면 어쩌지..
며느리한테 수발들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차라리 아빠가 먼저..'
근데 마치 내 속을 읽은냥 울 엄마 한마디 하신다.
"아빠가 아프면 내가 수발들면 되지만,
만약에 엄마가 먼저 죽으면
그땐 아빠 무시하지 말고 잘해줘야되.
지금은 괜찮지만, 아빠가 혼자되었는데
너희들이 무시하고 그러면 엄마가 마음이 아플거 같아.
그러니까 아빠 무시하고 그러면 안돼..."
"응.."
간신히 대답했다.
내 생각을 들켜버렸다는 미안함보다는
정말 엄마가 없음 어쩌나 하는 마음이..
목구멍에 주먹을 박아놓은 것처럼
목이 너무나 아파온다.
늘 아빠한테 불만이던 엄마.
그저 엄마가 아빠를 아주 많이 미워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애증일까...
살아가는동안 미워한 아빠이지만
엄마가 먼저 죽고나서
혼자남아 외롭고 힘들어할 아빠 모습은
그래도 싫으셨나 보다.
"이제 너 자"
"알았어.. 엄마도 이제 누워!"
"난 누우면 바로 잘거니까 니가 먼저 자."
"알았다니까. 엄마도 누우라니까."
"집에서도 매일 먼저 잔다며... 오늘은 니가 먼저 자.
너 잠들면 엄마 잘께..."
그게 엄마 맘인가보다
피곤한 남편보다 늦게 잠들어서
어쩔땐 배신감마저 느낀다는 딸내미가
오늘만은 먼저 편안히 잠들었으면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