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최규선이라고 하는 훌륭하신 의사 선생님의 인간적인
전화 안부 이야기를 듣고 리플로 달려다가
좀 길어질 것 같아 ..저도 그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보렵니다
저에게도 아름다운 의사 선생님이 두분이나 계십니다 ..
그 한분은 ..
아직 살아계시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그길가를 지날때 그 병원 간판이 크게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그분의 자제분이나
그 누군가가 가업을 이어 그 병원을 하고 계시리라 기억됩니다
지금으로 부터 40여년전
그러니까 제가 우리 나이로 5살쯤 되었을때 ..
가뜩이나 쉰둥이 막내로 태어난 신세라
늘 비실 비실 약골이었다
그 시절 누구나가
봉지쌀을 팔아먹고 집집마다
형제나 자매가 많아서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건
무지하게 드문 때였으니까요
제가 살던 동네도
비록 서울의 중심지라 하여도
집집마다 작은 방이 여러개 있고
그 작은 방에 한가족 많게는 6~7명이 한방에 자고 먹고
그러하던 시절입니다
저에게도 가족이 많고
그 많은 가족들이 밥을 먹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터 잡으신 용인에서
쌀가마가 올라와도
9남매를 두신 친정부모님 허리는
휘다 못해 구부러질 지경이었으니 ..
지금 같으면 그 많은 자식 학비도 못댈 지경이지요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생활력이 사람 체면을 깍아먹고
그런 저런 생각을 하기까지는 삶이 버거운 것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인지 어떤지 ..
우리 친정어머니는
어디를 가나 ..깍아대기 일쑤셨답니다
버스를 타고 쌀을 실어올 때에도
--예전에는 버스에 ..기사아저씨 말고 조수 아저씨가
가다가 버스가 망가지면 고치고 운임도 정하시고
일인 다역을 하셨죠 --
우리 어머니 음성을 낭랑하여 온 버스가 다 울리도록
시끄럽게 깍아대십니다
때로는 부끄러워 제발 조용히 조수 아저씨가 달라는데로
다 주시면 좋겠는데 ..하는 작은 소망까지 갖을 지경이었으니 ..
"헤이 조수 양반 ..내가 말이어여 구남매를 낳아서 기르느라
이쌀 팔고 학비대고 고생이 말이 아니지요 ..어쩌구 저쩌구
그 버스가 움직이는 한시간이 짧다하고 어머님의 하소연 내지
흥정은 용인에서 을지로 6가의 버스 정류장까지 올때까지 멈추질
않으셨으니 ..
어느 추운 겨울날 ..
심한 감기에 걸려 폐염으로까지 진행이 되면서
낡은 이층의 병원을 찾았다
치료를 받고
그 아픈 주사를 맞고
찡그릴 새도 없이
어머니는 바지춤을 올리시고
돈을 꺼내시면서
의사 선생님께 하소연이 시작되신다 ..
"제가 얘를 다 늦게 낳아서 ~~~~~~....."
어린 마음에 늙으신 어머님도 부끄럽지만
왜 끝도 없이 어딜 가시던 왜 이리
깍아 대시는지 ...고개를 떨구고 나는 이 곤혹스러운 공간을
빠져나오고 싶을 뿐이었다
결국 그 의사 선생님은 .치료비를 받지 않으신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다음 며칠까지도 ...????
그리고 나의 작은 손을 잡으시며
밥 잘먹고 어머니 말씀 잘 들으라고 ...
이상하게도 기억력이 좋은 나는
그 병원을 지날 때마다 용기를 내어 인사하고
지나간 감사의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
왠지 쑥쓰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병원이
종로 5가 마로니에 거리 진입하기 전 디자인 포장센터
건너편의 동산병원이다
인간적인 힘
그리고 의사 선생님으로서의 순수함 측은지심
끊임없는 성실함 ..그런 저런 힘으로 번성하신 것으로 사료된다
거의 20년전
벽돌로 잘 지어진 그 건물이 올라갔었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만 묻었을뿐 단 한번도 찾아 뵙지도 않고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서글픈 스냅사진이 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한 나의 뻔뻔스러움 일까 .
누구에겐가 베푼 작은 사랑
그것은 언제까지나
가슴을 파고들고 심금을 울린다
비록 그 보답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미 베풀어진 선행은 그 순간만이라도
사람의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고
자기 내부에 ..뜨거움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안위를 해보면서 ..
나는 오늘도 그 길을 스쳐지날 뿐이다
이제 이렇게 40년이란 세월이 지나버렸다 ...
세상에는 내세우지 않으며
작은 보살핌과 사랑은 나누어주는 분은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