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그리고 그 삼십년 보다 더 길었던 지난 삼년.
올해도 얼마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이 서둘러 글을 재촉한다.
아직 앙금조차 가라앉지 않았는데 지난 시간의 실타래를 풀수 있을까?
하지만 올해가 지나면 그냥 꿈이 되어 버릴것만 같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불행에 늪에서 허부적거리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혹 또다른 절망이 또아리를 틀고 날 기다릴까봐 안절부절.
모든걸 초월했다 하면서도 이별만큼은 아직 감당 못할 상처인 듯.
여자나이 서른.
모두들 이제 막 새가정을 이루고 미래를 꿈꿀때 ,
나만이 한숨뒤켠에서 안도의 정돈을 갈망한다.
어려서 난 망상가 였다.
소설같은 인생을 바라며 늘 자신을 거짓으로 치장하고 살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타이틀은 언제나 화려했다.
교육자이자 화가인 아버지,유복한가정, 오빠셋 언니 둘,6남매의 막내.
장애자의 대부인 아버지는 그냥 그렇게 내 프로필을 빛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면 족했다.
귀가 어둡고 늙고 초라한 행색에다 괴팍한성격의 현실속의 그와 마추칠때면 난 언제고 차갑게 외면 했다.
형제들의 두런 거림은 언제나 내 귓전에서 멈추곤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때,
비로서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나머지 다섯형제의 어머니는 내가 아닌 다른 여섯번째 아이를 가진채 만삭의 몸으로 철야예배를 강행하다 아이와 함께 땅속으로 묻혔다 했다.
엄만 지금도 사실을 알고도 삐뚤어 지지 않았다며 날 대견해 하지만,
사실 그때 난 오히려 속이 후련 했다.
엄마에게 손을 대는 큰 오빠의 패륜에 대한 답을 찾았으므로.
그날 이후로 난 달라지지 않았다.
엄말 이해해서가 아니라 약간의 위선과 거짓이면 이전처럼 좋은 집안의 예의바른 아이로 살아 갈수 있었으므로 굳이 상처를 꺼내놓고 아파하며 동정받길 거부 했다.
더 많이 자라서 그정도의 가정불화는 흔한일임을 알고서도
끊임없이 미래에 있을 탈출을 꿈꾸며 세월을 흘려 보냈다
내게 있어 결혼은 그런것이었다.
대학선배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때 이십년을 다듬어온 내 시나리오가 완성되는듯 싶었다.
유난히 순수한 미소를 가진 남자.
따듯한 성품.
무엇보다 날 끌었던건 사랑이 가득한 가정이었다.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고,하느님 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그의 말에 나도 그 가족구성원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환상은 이미 결혼전 깨어졌지만 내가 틀렸다는걸 인정하기 싫어서 이른 결혼에 발을 내딛었다.
아들로만 자라서 한여자의 남편은 결코 될수 없었던
그는 결혼당일에도 엄마를 따라 엄마친구들 뒤풀이를 위한 새벽장에 다녀와야하고,
결혼 날짜나 장소조차 자기맘대로 결정할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소함 때문에도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럽던지 ...
신혼초에는 그를 전부는 커녕 부분조차 맘것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행을 운운했었다.
시간이 지나 이렇게 글로 풀어 놓으니 아무 일도 아닌것을...
첫아이를 낳을 무렵 아버지가 아팠다.
만삭의 몸으로 달려간 병원.
엄만 별거 아니라 했다.
의사들끼리 전문용어로 하는말이 전립선 암이란다.
집에 돌아와 울고있는 날 보았다 그토록 미워한 아버지였는데 나는 왜 울고 있는걸까?
95년 가을,
아버지는 마지막 희망이란 이름으로 수술을 했고 난 큰딸을 낳았다.
암에걸린 아버지는 시댁에선 살인 전과자나 마찬가지였다.
내남편의 어머니는 자기자식들에게 헌혈 조차 못하게 하는 가족 이기주의의 전형이었다.
암이란 업보요 죄 받음이었다.
자기 아들의 여자이자 그 핏줄을 이어가야할 나에게 암환자의 피가 흐른다는건 견딜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건 내게 또다른 상처였다.
군 전역하고 버스운전하시던 시아버지 .
어려운 살림꾸미며 3남매 대학 보낸것이 인생의 보람인 우리어머니.
조건 좋은집 둘째 며느리 넘치는 혼수엔 좋아 하시더니,
암 소리에 질색하며 냉랭이 대하셨다.
난 이 화목한 집의 숙주에 불과 했다.
그동안 느끼던 외로움도 그탓이였을까?
그토록 싫던 친정이 그리워 졌다.
멀지 않았다던 아버지는 환자인게 무색하게 잘지내셨다.
우리 보배라며 딸아이도 예뻐해 주고 갑자기 효녀가 되어버린 난
전세를 천만원이나 올려 달라는 집주인의 요구를 빌미로 친정행을 강행했다.
남편이나 시댁이나 모두 펄쩍 뛰었지만
몇개월 후 입주할 아파트를 핑계로
친정엔 짐만놓고 시댁과 번갈아 오가겠다는 다짐으로,
명절에도 친정 못가게 하는 시어머닐 설득 했다.
그 당시 남편의 벌이가 없었기에 가능 했던일이다.
그때 이미 둘째를 임신중이었다.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고,
결국 97년 여름 ,그렇게 고통의 세월을 마감하셨다.
상복도 입지 못한 나는 아버지를 워망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했다
울아버지 땅에 묻던날 아침 모두들 예정일을 하루앞둔 나를 모두 염려 했다.
출산의 징후가 있었으나 ,아버지가시는길 배웅은 못해도 나를 대신할 남편 까지잡고 싶진 않았다.
식구들을 보내놓고 밥지어 먹고 딸아이 손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간호사가 대뜸 소리를 지른다
"보호자는요? 어쩌자고 애를데리고 와요?"
거기다 대고 뭐라 말도 못하고 .
나는 서러워울고 딸은 낯설어 울고.
가까운 곳에 사는 동창을 불러 떨어지지않겠다고 우는 두살박이 떼어놓고,진통을 했다.
그리고 출산직전 황망히 달려온 검은 양복의 남편얼굴.
그렇게 나의 수호천사는 이세상에 나왔다.
이번에는 단호히 시댁행을 거부 했다.
홀로 되신 엄마를 핑계로 떼를써서 친정에 남았다.
누가 말했던가 불행은 떼지어 온다고.....
아버지가 남긴건 작은 집과 학교.
장애자를 위해 엄마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그곳이 자식들에겐 그냥 꿀떡이었다.
나눠먹기엔 너무나 아까운 꿀떡!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둘째와 그에게 밀려났던 장남간의 암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슬픈 미망인에 후임 이사장이었던 엄만 그 암투의 도구에 불과 했다.
그즈음 난 시골행을 게획하고 있었다.
엄마의 평생소원이던 산자락 밑의 텃밭달린 작은집.
그리고 내아이들이 뛰놀 마당넓은 전원 주택.
그땐 그게 실패한 내 결혼 생활의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모든 걸 보상받으려 했다.
땅을 사고 만들고 목조 주택을 계약 했다.
빚을얻고 가진것 모두 팔아 준비한 돈이 내손을 떠나는 순간 IMF라는 놈이 내 뒤통 수를 쳤다.
살 집까지 팔아 월세를 얻었으므로 내손으로 흙집이라도 지어야 했다.
말않듣더니 거봐라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아 넘기며,
자전거도 못타던 겁장이가 오토바이로 참 실어 나르며 직영으로 엄마 집을 완성했다.
그리고 아기 돌전에 하고 싶어서 비오는 밤에 새벽까지 이사를 했다.
많은 돈을 잃고 계획보다 허름한 집이었지만,그땐 기나긴 불운의 여행을 마친것 마냥 행복했다.
아버지의 일주년 추모식을 마치고
초라한 아이의 돌상을 시댁에서 차리고.
니네 식구 올사람이나 있냐고 시댁근처 부페에서 하자며 가슴을 후비던 남편은 시장볼 돈조차 변변히 대지 못했으므로.....
"이담에 정말 잘해줄께.
지금의 이 고생은 다 널 위한거야"
유난히 가슴을 녹이던 우리 아가에게 늘 혼잣말 처럼 되뇌이곤 했었는데.....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없었음을 그땐 꿈에도 알지 못했다.
-7월이면 우리엄만 인연끊긴 장남이 아버지 젯상은 어쩌나하고 누가를 적시고, 남편 몰래 케??사들고 와 혼자 꾸역꾸역 먹는 못난 딸년 때문에 가슴 앓는다.-
뻔질나케 드나들던 차남은 몇십억 돈끌어 쓰고 도망가고,
엄만 이름 값을 치루느라 파출소 불려다니고,
돈 떼인 건설업체서 사람 보내 뚜드려 부시고,
엄마와 같이 사는 아니 엄마말대로 분신인 까닭에 내가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일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30년을 바쳐 일군학교를 끝까지 지키고 싶어했으나
그들이 바란건 이제 쓸모 없어진 노인네의 퇴장이었다.
미망인의 슬픔조차 가질수 없었던 엄마는 지칠대로 지쳐서 갈수록 쇠약해졌다.
나쁜 딸은 욕심의 끝만 놔버리면 되잖냐고 악악거리며 엄말 몰아 부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시댁에 아이를 맏기러 간 그 하루사이에 일이 벌어 졌다.
자신이 삼십년을 키운 남편의 두 아들손에 끌려 엄만 정신병원에 들어 가셨다.
막내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달에 70여만원 되는 입원비 때문이었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정신없이 엄마에게 달려가는 동안 누가 보건 말건 지하철서 내내 울었다 .-언제나 처럼 남편은 곁에 없었다. 내가 힘들때 항상 혼자였으므로 그때왜 남편없이 움직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정신병원이란 곳은 참 좋은 곳이다 누구든 싫은 사람 잡아다 돈만 내면 그보다 가까운 촌수가 아닌이상 빼내지 못한다.
그날 태어나서 지금껏 가장 초라한 엄마를 보았다.
남의 자식을 키우고 그손에 이끌려 그지경이 된 엄마를 아니 한 여자를 부둥켜않고 한참을 울었다.
약을 먹여 말조차 하질 못했다.
영락 없는 환자 였다.
"엄마 꼭 다시 데릴러 올께"
아이처럼 울며 끌려 가는 엄마의 뒷 모습을 보며 그래도 살아계심을 안도해야만 했다.
집에와 시어른들께 평생 흉이 될 이야기를 설명하고 아이들을 맏기고
다음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에게 울엄마 그런사람 아니라고,
의사는 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잡아두냐고,
아들이 넣었으므로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친 딸이라고,
안다고 했다.
남보기에 패륜처럼 느껴질까 그랬는지 불행중 다행으로 친자가 아님을 밝혔단다.
친 딸의 권리로 각서를 쓰고 개중 맘 약한 막내에게 통보를 하고 집으로 모셔 갔다.
친절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약이 독하다고 우유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참 다행이라 했다.
한참 만에 찾은 자신의 처형은 결국 약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루 밤을 보내고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고 앞이 막막했다.
엄마 없이 처음 밤을 보낸 아가걱정에 전화를 거니 저편서 들려 오는 울음소리.
두고도 모시고도 다녀올 수 없는처지 .
그렇게 그 시골집에 아니 이세상에 우리 모녀만 달랑 그렇게 울고 있었다.
평소 성품 좋던 엄마 친구분께 사정얘기드리고 엄마를 맡겼다.
약기운이 가신뒤였지만 충격에 파리해진 모습만으로도 가슴아파 하셨다.-남도 이럴진대...-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도 모시고 집으로 돌아 왔다.
정신병자에 한글미해득자 운운하며 이사장 자리에서 강제로 밀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사로 있는 변호사(차남의 친구)를 찾아가 모든걸 포기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젠 서로 물고 뜯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엄말 모셔가겠노라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 마져도 이젠 놓아 버리겠다고.
그 변호사의 방에서 본 커다란 십자가와 자신의 선행이 실린 기사의 스크랩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선하게 살면 복받으시겠네요.
참 복받을 인간 아니 인간인지 잘 모르겠다. 돈의 노예들이다.
살만큼 살면서 더 많은 걸 갈구하는,
욕심앞의 인간은 얼마나 더 추할수 있는것일까?
그렇게 98년이 지나갔다.
99년엔 좋은 일만 있으라고 애써 그렇게 상처를 덮으면서.
99년이 왔다.
그해 봄에 난 죽었다.
지금의 난 이미 껍데기 이다.
난 매일 무대에 오르는 삐에로 이다.
단지 다시 돌아온 아가에게서만 인생을 느낄수있는 한정된 삶을 살고 있다.
아무도 지금의 나에게서 내가 지난해 겪은 불행의 냄새 조차 맏지 못한다.
99년 봄.........
-2편에 이어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