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여왕인 당신께...
투명한 은빛의 바늘이 하늘에서 77도의 사선을 그리며 쏟아
지자, 때 맞추어 숲에서는 우울한 표정의 그늘이 몰려왔습니
다. 눈을 떴을 때, 두 개의 창이 공간에 머물러 있었고, 새
벽의 연푸른색이 모니터의 절전모드로 희미하게 발광하고 있
었고, 그 바로 뒤에 이 행성의 대기로 향하는 현실의 창이
열려 있었습니다. 아침이 밝았고 숙취가 정수리에 머물고 있
었습니다. 시력보다는 청력이 빠른 것이어서, 타다다다! 대
지를 두드리는 무게가 실린 빗방울의 명랑한 음성과 쫘아아
아! 하는 물소리와 처마 밑에서 자유낙하를 하는 간헐적인
낙숫물의 소리가, 공허한 서식지에 수면 위의 파동처럼 메아
리 집니다. 지난 밤은 많은 웃음과 많은 이야기들과 상당한
부피의 담배연기였습니다. 새로운 표정들과 새로운 심장들과
새로운 열 개의 손가락들이, 모두들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
이고 있었고, 피곤이 몰려 왔습니다. 나는 어깨 언저리가 묵
직하게 저려 오고 있었음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
로... 라는 마음속의 경계선은 계속 허물어지고 있었고, 비
례적으로 소주병은 자기복제의 능력을 가진 것처럼 늘어갔습
니다. 차갑고 투명한, 또 다른 인생의 가솔린이 목을 타고
흐를 때 비로소 나는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존재하고
있었고 나는 실상이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때로
거룩하다고, 때로는 구차하다고 느껴지는 중년의 손은 단순
하고 반복적인 동작을 계속하고 있었고, 습관처럼 나는 취기
에 따라 그리움이 다가오는 오싹함이 어깨를 오르내리고 있
었습니다. 지나버린 사랑이었고, 아직 머물고 있는 시간이었
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의 뿌리깊은 고독입니다.
Katiucha에 이어 Volga boatman 이 러시아의 바람을 몰고 큐
브의 공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 공허
한 심장을 가진 한 사내의 눈동자에, 당신이 남긴 파란 공간
의 귀퉁이에서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나의 시간이 보입니다.
그곳에서는 당신도 나도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살아 있으되
존재함이 없이, 그렇게 반쯤 입을 벌린채 정지동작의 일상위
로, 역시 존재감도 의미도 없이 상실된 7년을 기다려온 매미
의 껍질이 되어 떠있습니다. 당신은 떠남으로서 모든 것을
일시에 종식하려 하였고, 그때 우리 두 사람의 사이에는, 이
미 한없이 넓은 들녘의 끝으로 달려가는, 가을을 담은 노을
같이 공허하게 비어버리고, 바삭하게 말라버린 무표정한 마
음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슴속의 나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고, 나 역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
다. 그러나 떠남과 남음, 그리고 그뒤의 시간에는 너무나 많
은 것들이 남겨져 있었고, 언젠가 동경의 긴자거리, 그러니
까 소방서 쪽에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왼쪽에 솟아 있던 한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던 100인 상차림의 양식세트를 사용한
성대한 잔치가 끝난 후, 커다란 샹드리에의 천정이 높은 공
간에 서서 얼마 남지않은, 몇 개의 촛불에 의지하여 나 혼자
그 뒷처리를 하여야만 하는,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는 불면의
막막함이었습니다.
선물받은 몇 권을 책을 들고 책상에 앉아 있다가, 너무 지나
치게 스스로 재떨이가 있는 풍경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뜰
아래 숲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댓돌위에 놓
인 구두를 바라보다, 문득 자아 여기요. 하는 당신의 음성이
귓가에 가볍게 내려 앉아 머무릅니다. 진흙과 말똥이 묻어
더렵혀지고, 발 뒤꿈치 부분의 가죽이 낡아 반은 얇아진 이
젠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기 어려운, 그런 고동색의 일반적인
구두입니다. 저기 뭘좀 준비했어요. 뭐? 여기요. 두툼한 종
이 상자안에는 연한 미색의 조그만 자루같은 주머니가 다시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띠고 있었고
커다란 두눈이 장난스럽게 또릿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
다. 음? 구두네? 그렇군. 고마워. 그리고 전체적으로 조금
투박하고 크게 생긴 그 구두를 신어 보았습니다. 편안한 느
낌이었습니다. 좋아요? 좋아!, 마음에 들어요? 아니. 왜요?
내겐 마음에 드는 것! 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이 세상에서 당
신밖에 없어, 알잖아. 당신만이 1000% 내 마음에 드는 때로
나보다 더 중요한 그런 존재야.
당신이 나를 위하여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따져 골랐을 것 같
아, 구두를 신은 채 방안에서 전신거울을 한번 더 보게 만든
그 Gucci의 구두입니다. 그렇게 몇 일을 신고 다니다가, 당
신을 위한 뭔가를 준비하려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마침
Salvatore Ferragamo 와 Gucci 매장은 곁에 있었기에 당신이
물건을 고르는 시간에 Gucci매장에 건너가 무심코 당신이 산
구두와 같은 구두를 보고 가격표를 보다가 흠? 하고 놀란 기
억입니다. 그리곤 돌아오자 마자 닳아지기 쉬운 바닥의 가죽
에 고무창을 덧대고, 당신과의 소중한 시간이 있을 때에만
신곤 하였던 그 구두입니다. 당신에게 무리한 선물이었어!
라고 나는 말하였고, 좋은 신은 좋은 곳으로 삶을 데려다 준
대요! 라고 당신은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다른 행성으로 공
간을 넘어 이주하고 난 뒤, 나는 그 신발을 기억보다도, 더
재빠르게 빨리 닳아 없애 버려야지! 하고 결심을 하였습니
다. 해서 매일 신고 다녔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무리
한 운동을 하여도, 나는 그 신발만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리
고 벌써 5년여의 시간이 천천히 한걸음씩 다가오고, 다시 멀
어져 갔습니다. 신발은 아직도 모양을 갖추고 있고, 이젠 가
장 자주 신는, 맨발이 아니라면, 항상 나와 함께 하는 편안
하게 낡은 친구와 같은 익숙함의 그 신발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것 같습니다. 원하는 대로 모두 되는 것은 아니지
만, 일부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있고, 전혀 의지대로 되지
않는 버릇없이 제멋대로인 나레이터와 같은, 또 다른 한 축
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준 좋은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좋은 곳! 이라고 부를 만한 곳을 거쳐서 걸어 다닐 수 있었
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 가장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당신이 아닌, 당신이 선물한
신발과 깊은정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라
는 것은 정말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지
금 좋은 신발에 의하여 좋은 곳을 지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한바탕! 영화속의 갱들이, 알고 보면 늘 어리석은 이유에서
톰슨 기관단총을 함부로 쏘듯이 하늘에서 폭우가 내렸습니
다. 작은 개울이 되어 버린 서식지의 앞에서 하얀 뼈들이 드
러 났습니다. 그간 방울이가 줍고 모아서 땅속에 모아둔 것
입니다. 그런 것들이 개들의 양식이 될른지는 정말 알 수 없
지만 열심히 땅에 심어놓은 뼈들에서, 돼지나무도, 소의 나
무도 자라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방금 뱉어낸 포도의 씨앗
들도 후두둑! 땅위에 놓였지만 절대로 포도 나무가 올라 오
지는 않을 것입니다. 몇 년이 흘러도 그런일은 없을 것입니
다. 하지만 방울이는 또 열심히 여러 가지 자신의 컬렉션을
묻고 또 묻을 것이고, 나 역시 이런저런 씨앗들을 버리거나
묻게 될것입니다. 일부는 나무로 자라나고 일부는 그렇지 않
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당신이 그간 흘린 눈물이, 당신이 그간 내게 선물한 시간들
이 당신이 나를 떠나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헤어진지 한참이 지난 어느날 알게 되었습니
다. 그냥 떨어진곳에서도 당신의 다가옴을 알 수 있었던, 당
신의 향수 내음처럼 스르륵 머리속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런 것이었더군요, 당신도 나도 애썼고, 필사적이었고, 당
신은 나를 많이도 사랑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선물도, 당신
의 눈물도, 모두 나를 위한, 나에게 남아있기 위한, 남아서
함께 해주기 위한 안갖 힘들이었을 수 있다는, 이율 배반적
인 사실을 이제는 압니다. 당신도 나도 함께 사랑이라는 전
장터에서 헤어짐에 대항하여 싸운 동료라는 것을 압니다. 물
론 그것은 전투이므로 이길 수 도, 질 수 도 있는 일이었겠
지요.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상처 입었고, 지금은
패전의 쓰라림을 함께 나눈것이 될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
구를 원망하고, 그러니 누가 잘잘못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이런저런 일로 이런저런 추억으로, 가슴속을 뻐근하
게 헤치고 돌아다닌다고 하여도, 그렇게 끝없는 가로수 아래
의 저녁길을 언제까지고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걷고 있
다고 하여도, 어쩌면 당신이 고정 출연하는 머리속의 채널을
다른곳으로 돌리지 않는 것은, 모든 예고된 시간이 끝나면
마지막에 나오는 머리속이 하얗게 비어 버릴것만 같은 없슴
과 정지의 상태를, 나 스스로 저으기 두려워 하고 있는 까닭
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당신과의 일들이 내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 자신의 가슴속에 웅크리
고 있는 존재의 이유와 당신이라는 호흡의 무게가 내겐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좀더 명확한
상태로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런 것이었어! 라고 덮
어 두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기억의 어깨위에 거미줄
이 쳐 지고, 먼지쌓인 시간을 털고 몇 번을 고뇌 가득한 책
상위의 평평한 곳에, 툭툭! 쳐서 정렬하고, 방금 레이저 프
린터의 출구를 뛰쳐나온, 따끈하고 깔끔한 보고서의 두툼한
뭉치를 네귀퉁이 모두 가지런하게 놓아 두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아직도 발견하고 찾으려고 하는, 과거와 미래
만큼이나 의미가 다른 시간들이 세탁기 안에서 탈수가 끝나
고, 소용돌이처럼 감겨져 버린 은하계를 닮은 빨래같은 시간
들의 첫 번째 단추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것이 발견되
면 나머지의 것들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어둠속에서 천천
히 드러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랑해. 라고 내가 말하였습니다.
사랑해요. 라고 당신이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서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해. 하고 내가 말하였습니다.
정지된 당신의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사랑하고 있나? 라고 내가 말하였습니다.
정물화가 되어 버린 당신의 두 눈은
이미 얼마나 많이 깊어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끈적한 액체가 되어버린 당신의 슬픔이
당신의 눈언저리를 덮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빛의 비현실적인 우물이 되었고
나는 당신의 봉인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자아가 되어 당신의 답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기다렸습니다.
당신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습
니다. 그것은 일상이 되어 가고 있고, 조금씩 탈색이 되는
붉은색의 사랑강조기간! 의 표어와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조심스러운 것은, 당신과의 추억이 완전하
게 탈색 되고, 지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 그저 방울이가 묻
어버린 뼈나, 내가 뱉어낸 흙으로 회귀할 포도씨가 되는 것
입니다. 나는 결국 의미를, 봉인을 풀지 못한 채, 그저 그렇
게 되고 말았어! 라는 무위의 답을 나 자신에게 하게 되는
악몽이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끝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나의 영원한 여왕인 당신께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이밤에도, 어제밤에도,
또 내일과 그다음의 내일 밤에도...
세 그루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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