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김치가 다 떨어지고 없다는데...'
'어? 그래, 알았다. 오후에 네 마누라 보내.
그러잖아도 오늘 시장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 수 있으면 오라 해.'
수화기를 놓고 생각해 보니
내 주제에 김치를 주겠다고 했던 게 어이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 오는 동안 한 번도 김치를 담궈 본 적이 없는 나.
그동안 늘 친정 엄마나 여동생,
그리고 주변의 친구나 직원이 보급해 준 김치나
주문해서 사다 먹은 게 전부였는데,
남동생이 김치가 없다 하니
마치 김치냉장고에 쌓아두기라도 한 것처럼 오라 하다니...
부랴부랴 사무실을 정리하고 시장 갈 채비를 한다.
그러고 보니 두어달 가까이 정신을 놓고 지내던 터라
시장을 간 기억이 없다.
사야 할 품목들을 간단히 메모하여
시장으로 향했다.
집에 먹을 만한 반찬이 없단 생각에
오늘은 꽃게장을 만들어 볼까 하다가 피식 웃었다.
아이구 내 주제에...
만들 줄이나 아느냐구...
산 꽃게를 사려고 시장을 이리저리 다녀도 안 보인다.
냉동 꽃게만 몇 군데 보일 뿐...
'너무 비싸서 안 갖다 놨어요.
일킬로에 사오만원 하는데 팔 자신이 없어서요...
그리고 속도 안 차고 오히려 냉동게 더 나아요.
알이 꽉 차 있거든요...'
그래도 싱싱한 산 걸로 담궈야 된다고 들었는데...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얘, 꽃게 좀 살려 했는데 산 게 없다. 어쩌지?
산 건 일킬로에 오만원 한대.
그래서 안 갖다 놨대...'
'뭐?? 오만원씩이나?
세상에...
언니, 그거 일킬로에 두세마리 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비싸??.'
망서리다 할 수 없이 냉동 꽃게를 사기로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맛조개도 사고,
깻잎 장아찌 좀 만들어 볼까...
참, 요즘은 파김치가 맛있다 했지, 파는 다듬어 진 걸로 두 단...
'언니, 파김치는 참쌀 가루로 죽을 쑤어야 하는데...'
어?? 찹쌀 가루...? 없는데...?
'없으면 밀가루도 ?I찮아,
죽을 쑤어서 해야 양념이 잘 버무려 져...'
누가 언닌지, 동생인지...
'언니, 하다가 모르면 전화 해.'
히히거리며 동생이 이것 저것 설명을 해 댄다.
에~라, 모르겠다
하다 보면 뭔가 되겠지.
나오는 길에 마침 시장통에 붕어빵 트럭이 보여
천 원어치를 샀다.
혼자 먹기에는 좀 많다 생각하며 막 먹으려는데
저 건너편에 아들넘이 하교하는 길인지
터덜터덜 걸어 오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갑던지
막 베어 문 붕어빵이 뜨겁지만 않았다면
잽싸게 차 문을 열고 소리쳐 불렀을 텐데
급한대로 경적을 울렸다.
녀석도 먼 벌치서 엄마차를 알아 본 듯 자꾸만 고개를 쑥 빼어
내 차를 넘겨다 보려 하고 있다.
철부지처럼 냅다 달려 오는 아들넘에게
붕어빵 한 개를 내 밀었다.
'엄마, 붕어빵 사 먹으러 왔어?'
이넘은 꼭 엄마를 무슨 먹보 대왕쯤으로 여기나 보다.
'아~녀, 이넘아, 너 좋아하는 꽃게 사러 왔어.'
부랴부랴 시장 봐 온 것들을 씻어 준비를 하는데
남동생의 여자가 들어 왔다.
'아~니, 좀 시켜 먹으려 했더니 이제 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얼마나 기쁘던지...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며느리가 반찬 만드는 모습 보셨으면
너무너무 좋아 하셨을텐데...'
전에 자식들을 위해 서둘러 반찬을 만드시던 엄마가 생각 나
새삼 가슴이 아프다.
'제가 복이 없어서요...
살아 계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뭘~그래? 요즘 누가 늙으신 시어머니 모시고 싶어 한다던?'
'아니어요, 정말 계시면 잘 모셨을텐데...'
그래... 말만으로도 고맙지...
우리 엄마가 복이 없으신 게야...
주방에서 반찬을 만들며
이젠 엄마의 대를 이어
내가 이렇게 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몹씨 마음이 착잡하다.
마치 친정어머니가 딸 밑반찬 준비를 해 주는 모양새와 똑 같다.
죽을 쑤어야 한다 했는데...
밀가루가 어디 있을 텐데...
냉동실을 뒤지다 눈이 똥그래졌다.
찹쌀 가루.
분명 그렇게 쓰여 진 물건이 하나 있는 게 아닌가.
틀림없이 엄마가 전에 쓰시고 남으신 건가 보다.
다 큰 어른 딸래미 먹게하시려고
냉동실 칸칸마다 양념이며 잡곡이,
엄마의 손길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엄.......마......
눈물이 핑 돈다.
'형님은 참 손이 빠르시네요'
선 채로 꽃게장 무침, 깻잎 무침 양념,파김치 담기,
고추무름,멸치볶음을 순식간에 해 놓고 나니
동생댁이 한마디 거든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 일단은 만들었다.
김치냉장고를 뒤져 배추김치와 무김치를 퍼 주고
차로 실어다 주며 내가 마치 친정엄마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전엔 엄마가 이렇게 싸 주셨었는데...
'난 아무래도 전생에 친정에다 엄청 빚을 많이 진 모양이야.
그래서 이렇게 너희들 치다꺼릴 하고 사나 보지...'
피식 웃었더니 따라 웃는 그녀.
평생을 엄마 속을 썩여 온 망나니 아들넘.
사춘기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하여
사십 넘도록 제 삶 하나 책임 지지 못한 불효 자식.
철 들면서부터 여자를 몇 번씩이나 바꿨는지,
그럴 때 마다 사고를 쳐 그 뒷처리는 늘 내 차지.
엄마 속은 오죽 하셨으랴...
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사업 한답시고 말아 먹고,
과수원 한다기에 시골에 터 잡아 줬더니 탕진,
여동생네와 함께 동업한다더니 어느날 사라지고 없고...
못 먹고 못 입고 아껴 그넘 뒷바라지에 쏟아 부은 게 얼마일까...
그 사이 내가 준 돈이면 아마도 높은 빌딩을 지었으리라...
아무리 형만한 아우 없다지만 나 같은 누나가 어디 또 있을까?
난 택시비 아까워 걸어서 출근할 때
그 넘은 가까운 거리도 걸어다니는 걸 못 보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뭐는 어쩐다더니 딱 그 짝이다.
마지막 가시는 길 한달여를 엄마 병상을 지키느라
그나마 자식 노릇 흉내는 냈다 할까...
제 아들도 연로하신 엄마께 팽개 쳐 두고
몇달 만에 한 번이나 올까 말까 몇 년을 그렇게 소식도 없더니
엄마 병 얻어 돌아가시게 되니 그제야 돌아 온 탕자...
넌 엄마만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호적에서 파 버릴거다라고 늘 생각해 왔었는데
엄마가 그렇게 마음 쓰시며 애착을 가지신 잘 난 아들인지라
그렇게 막보기로 되진 않았다.
그동안 깊게 쌓인 미움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이제라도 마음 잡고 잘 살아주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간절할 뿐...
'형님이 우리도 김치냉장고 사주신댔다면서요?'
뭐?? 이게 뭔소리여???
막내 여동생에겐 내가 사 주기로 했던 게 확실하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소리인데...
사 주라는 소리보다 더하네 내참...
'그~래? 열심히 잘 살아 봐. 까짓것 사 주지 뭐.'
말 나온 김에
이삼년 뒤엔 중고차라도 하나 사줄께.
정말 잘 살아라...해 버렸다.
저랑 나랑 두살 차이일 뿐인데
난 꼭 그 넘의 엄마같다.
이젠 보기 좋은 행복한 가정 꾸리며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인생 살아가기를,
제발 안정적으로 잘 살아주길 빌고 또 빈다.
아마 하늘에 계신 우리 엄마도
아들넘이 잘 살 수 있도록 돌봐 주시겠지...
꼭 그래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