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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남원


BY 이화 2001-08-03

오늘부터 본격적인 휴가철이라는데
우리 가족은 어제 휴가를 다녀왔다.
남들 보다 한발 앞선 휴가라
곳곳이 한산한 행운은 있었지만
휴가 3일 중 2일은 비 때문에
낮에는 쇼핑, 밤에는 온식구가
PC 방에서 진을 쳤다.

뭐, 그렇게 보내는 것도 괜찮았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 가족끼리
대화방을 개설하여 수다를 떨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 있었다.
휴가 기분은 마지막 날 남원에 가서였다.
남원은 내가 남편이랑 연애할 때
처음으로 밟아본 전라도 땅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얘기를 하면서
조금 걸어가자 바로 시내였는데
젊은 사람, 특히 젊은 남정네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아서
의아했던 기억이 어제처럼 남아있는 그곳...
우리의 숙소는 부도가 나서 관리에 들어갔다는
콘도였는데 작년에도 묵었던 곳이다.

밤이 되어 콘도 옆 조각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남원시립국악원에서 9월 말까지
매주 화,목, 토요일에 무료공연을 한단다.
예향답게 전주나 남원에 가면 판소리나
민요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대중가요를 창 하시는 분이 부르는데
아주 멋있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자
오색의 조명이 켜지면서 공원의 분수대가
일제히 물을 내뿜었다. 분수대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르고 분수대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갖가지 모양의 물기둥을 연출하였다.

정녕 그런 환상의 쇼는 처음 보았다.
행운이라면 그것도 아주 큰 행운이었다.
쾅쾅 울려대는 댄스음악과 조명, 분수대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20분 동안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남도는 전체가 예향이라더니 과연......

이쯤에서 나의 생각이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옆에 있는 남편의 뒤통수를 보자 갑자기
연애시절 남원에 같이 왔을 때
나를 황당하게 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성을 좋아한 기억이 없는 내가
오랜 세월 남편을 사귄 이유는
그의 진실함에 믿음이 갔기 때문이었다.
남원에 데이트를 하러 둘이 간 날
시내를 걸어가는데 남편이 지리를
아주 잘 아는 것이었다.

여기를 잘 아시네요...

생각없이 한 나의 말에 남편은
얼굴이 굳어지며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낮은 일본식 주택이 늘어선 거리를
걸어가는 내내 말이 없던 남편이
과묵한 입을 열어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전에 친구랑 미팅을 하러 이곳을 왔었으며
그때 만난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이후에도 여러 번 남원에 왔었다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5분, 10분 시간이 지나면서
기분이 말도 못하게 불쾌해지는 것이었다.
그냥 침묵하지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적어도 남원에 와서 남원 아가씨 사귄
이야기는 하지 않을텐데....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침내는 나를 그렇게 만만하게 봤나?...
하는데까지 이르렀고 나는 참지 못하고
그만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오던 길을 되집어 터미널로 가는 길이
왜 그렇게 길었던지.

남편은 여전히 말없이 나의 뒤를 따랐다.
나를 달래려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화가 덜 났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그 시늉을 하지 않았다.

참다 못해 내가 휙 돌아서 남편을 마주보며
아직 그 아가씨를 못 잊어 내게 말하는거야요?
아님, 여기 오니 그 아가씨가 생각나나요?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짓던 남편은
말없이 자신의 구두 끝을 내려다 보더니
그만 가자......
단 한마디 했다.

간이 작은 만큼 심약한 성격인지라
남편의 그 이야기를 삭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이번 휴가 때 또 되살아난 것이다.

남원...하면 내가 참 좋아하는 곳인데
이곳에 오면 당신이 생각없이 한
이야기가 떠올라서 화가 나...
지금도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왜 했는지 모르겠어...
최소한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때처럼 남편은 말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남편의 뒤통수를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 이후로도 소소한 여자 이야기로
나의 속을 상하게 한 것이 무려
몇 번이었던가......

내년에 남원에 올 때는
남편의 뒤통수에 입 맞추고 싶은,
그런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와와...거리는 아이들의 탄성이 끝나고
분수쇼도 끝났다.
콘도로 돌아오면서 남편의 팔장을 꼈다.

완벽한 아내의 성격 때문에 남편이
가끔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릇 남자란 자주자주 점검하고
기름치고 확인해야 하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