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의 입성을 반대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아버지가 그렇게 떠나셨다. 곧이어 언니도 조카를 친정에다 남긴 채 개가를 했다.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은 큰오빠는 군입대를하고 개천에서 용났다고 동네사람들 누구나 부러워하던 작은 오빠는 학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 갔다. 막내 오빠가 집에 남았었는데 맨날 다마장(당구장) 출입을 한다고 작은오빠가 손목을 묶어 놓고 큐대로 때린 기억이 있은데 두살 터울인 형한테 반항하지 않고 매를 맞던 오빠가 그래도 기특했던 것 같다. 한창 사춘기때 집이 풍비박산이 났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으랴?! 기실 나와 오빠는 10년이란 나이 차이가 나서 막내오빠는 집안의 응석받이로 온갖호사와 귀염을 독차지하면서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컸다고했다. 졸지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세가 기울어 버린 우리는 집이 두개가 필요 없었다. 관사집은 함께 딸린 밭이 꽤 많아서 남을주고 부치는 형편이었다. 가재도구도 그냥 놔둔 채 아랫녘에서 떠들어온 젊은 부부에게 집과 밭을 맡기고 우리는 전방이 딸린 정거장 집에 모여 살 수 밖에 없었다. 가게는 되는둥 마는둥, 아마 할머니의 돈으로 생활을 충당해 갔을 것이다. 작은오빠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그때까지만해도 어려운 티 안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집안에 남자 형제가 많으면 그중에도 여자 행세를 하는 자식이 하나 있듯이 작은 오빠는 입안의 혀처럼 누구나가 다 부러워하는 그런 성품이었다. 화초도 잘심고 화단 정리도 잘하고 찬찬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그야말로 똥도 버리기 아까운 사람이었다. 집안팎으로 화초와 나무가 즐비해 해당화로 만든 울타리에 등나무 그늘.. 그리고 뒤란에는 돌배나무, 대추나무, 보리수나무 그리고 그 그늘아래 기다란 벤취... 노란 키다리꽃, 옥잠화, 채송화, 맨드라미, 깨꽃, 다알리아,활련등등 계절마다 피는 갖가지 꽃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줬다. 오빠는 가끔 그 벤취에 들어가 나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나 흐느껴 울던지! 아마 어린 동생의 불투명한 앞날이 애처로워서 그리 울었으리라. 그런대로 우리 식구는 환경에 적응하고 잘 지내고 있을 무렵에 장마당 근처에 사는 할머니 수양아드님의 부인되시는 분이(우경이 엄마) 어디서 노는데 오셔서 나를 슬그머니 부르셨다. 아줌마네 집으로 빨리 오라고... 설날이면 한복입고 첫번째로 세배 드리러 가는 집이 그집이고 할머니 살아 계실때는 정말 친척처럼 다니던 집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갔더니 거기에 아버지가 계신것이었다. 시간이 날때면 아버지 욕을 하시던 할머니에게 세뇌되어 난 아버지가 저승야차보다 더 싫고 징그러웠다. "옥아... 이리 한번 와 바라... 많이 컸구나." 더듬 거리시면서 나의 손을 잡으시고 이승만 얼굴이 그려진 백환짜리 몇개를 손에 쥐어 주셨다. "이사람은 나의 아버지가 아냐 이사람은 필시 무서운 사람일 꺼야"하고 아버가 주신 돈을 난 야멸차게 뿌리치고 그품에서 빠져 나왔다. 공포심에 얼마나 뛰었던지 등줄기가 서늘해 질 정도였다. 그날의 일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 두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