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여인)
최현숙.
내 마음속의 그대는 전나무처럼 푸르다.
세월은 나에게만 와서 나만 홀로 늙어버렸다.
은발이 되어버린 연인을 그대는 용서할까.
그대를 만나기 전엔 나는 마음놓고 늙지도 못한다.
그여자 이야기.13
그 남자의 집은 신작로에서 북산 쪽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있다.
대문 옆으로는 염소우리가 있고 안마당에 들어서면 대청마루 옆 외양간에 소 두 마리가 매여져 있다.
화단을 따라 봉숭아꽃이 철마다 피어나 그 지난해에는 딸아이와 함께 놀러가 봉숭아 꽃물을 들인 적이 있는 다정한 집이었다.
서른세 살 난 그의 아내는 무척 부지런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소여물을 주고 밭에 나가 고추밭 배추밭 깨밭 마늘밭에 풀을 뽑고 집에 돌아오면 일곱 시.
고무신에 묻은 흙을 수돗가에서 대충 닦아내고 들어와 부뚜막이 높은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그 여자의 아침상엔 잡곡밥 안에서 푹 쪄진 부드러운 애기순 호박잎이 몇 잎 올라와 있고, 그 남자의 순한 딸아이는 논둑길에 심어 거둔 콩을 윤기 나게 조리고서 볶은 깨 푸짐하게 뿌린 콩자반으로 쉴새없이 젓가락을 가져가며 맛있게 먹는다.
그 남자는 쉬지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해도 매년 짓는 농사로는 남의 논밭 도지를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 돈을, 그놈의 돈을 평생 못 벌 것 같아 어느 날 젊음이 가기 전에 돈을 벌자 굳은 결심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배에 올랐다.
이 년 계약으로 원양어선을 타기로 한 그 남자의 눈매나 입술이 어찌나 무거워 보이는지 눈 한 번 꿈쩍이면 그 남자가 몇 시간 동안 마주앉아 할 말을 다 쏟아낸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 오고는 했다.
그 남자가 가족을 위해 힘든 길을 떠나고 그 남자의 아내는 인자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알뜰하게 살림을 일구며 살았다.
어느 날부터 그 여자는 고생하며 바다에서 일하는 남편을 생각하고 자신도 읍내 식당에서 설겆이 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같이 벌면 남편이 돌아오는 날 논 몇 마지기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 여자의 거친 머릿결에 윤기가 돌기 시작했고 밭일에 매달려 돌보지 않아 기미가 낀 얼굴에 조금씩 화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옷차림이 전에 없이 혼란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귀걸이가 작은 키에 찰랑거리며 붙어 다녔다.
굽 높은 구두를 뒤뚱거리며 낯선 남자와 어울리는 그 여자의 행실이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그 여자의 속 깊은 어머니는 며느리가 일구어내었던 밭일을 묵묵히 혼자 하기 시작했다.
"우리 며느리가 어떤 며느리인데... 우리 아들 고생하는 거 안타까워 하루 종일 남의 집 구정물에 손 담그고 몇 푼이라도 더 벌려고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우리 며느리.
없는 집에 시집와서 어떻게든 살아볼려고 애쓰는 착하디 착한 우리 며느리."
그 남자의 어머니는 안 좋은 말이 돌 때마다 그렇게 덮어두며 진종일 밭에 나가 햇볕과 싸우며 속을 태우고 쇠약해져 갔다.
읍내의 식당에 나간 지 다섯 달쯤이 흐른 어느 날.
그 여자는 눈이 맑은 딸아이와, 인자하시고 배려 깊은 어머니와, 가족을 하늘처럼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끈끈한 도시로 누군가와 떠나갔다.
그 여자가 떠난 날부터 북산 언덕길에 있는 나리네 집엔 유난히 노을이 오래도록 머물다 밤이 찾아왔고 삐걱이는 대문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고 소가 팔려나가고 염소가 팔려나가고 대신 주인 없는 강아지를 거둬 먹여 키운 발발이만이 나리를 쫓아다니며 마당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린 지난 겨울 언덕길 대문 앞 수북히 눈 쌓인 길 위에 발자국 없는 날도 며칠인가 있었다고 했다.
나리와 나리 할머니는 눈처럼 세상을 덮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비오는 날. 그 남자가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돌아왔다.
긴 가뭄을 끝으로 찾아온 비처럼...
모두들 그 집 문전을 오가며 슬픈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애들을 썼다.
어떤 이는 걱정이 넘쳐 "혹시 농약병은 보이는 데 두지 않았겄지."하는 말도 흘렸다.
가물 때는 집이 바싹 들릴 것 같던 북산 언덕 위 나리네 집이 비온 끝엔 한없이 한없이 젖어들어 영영 마를 것 같지 않은 그림자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 남자가 나리의 손을 잡고 가겟방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돌아오는데 그 얼굴이 어찌나 무겁던지 눈 한 번 꿈쩍이면 바라보는 이 모두가 울어버릴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점심나절. 동네에 119 구급차가 들어오고 병색이 깊은 어머니가 실려 나가고 그 남자가 뒤따랐다. 절망과 실의와 분노가 교차하는 듯한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동네 입구에 노란 손수건 하나 걸어놓고 그 여자가 빨리 돌아오길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