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기엔 왠지 어색하고 겨울이라기엔 더 더욱 어색한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시골을 함께 내려온 나와 남편.. 남편은 동문회가 열리는 곳으로 나는 옥천역으로 향했다. 3년 전 이곳 시골로 내려와 농원을 하고 있는 친구를 모처럼 시골에 내려온 김에 역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바람이 너무 불어 숄이 날아 갈 것만 같다. 광장에 서 있기엔 너무 추워서 역 안으로 들어 온 난 순간 너무나 청결하고 깔끔한 역안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시골역은 왠지 어둡고 지저분할 곳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어쩌면 이렇게 깨끗할 수가.. 마치 카페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티 테이블과 화분들이 여백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한 벽면엔 종류별로 갖가지의 자판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향기로운 역안을 보자 조금 전보다 더 상쾌해진 기분으로 밖을 내다보며 친구를 기다리고 서있는데 문득 역안에 걸려진 액자 한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시 반작 시작 이반? 아니.. 이반 시작? 이반이라면.. 동성연애자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한데.. 무슨 내용의 글일까?..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액자 있는 곳으로 가까히 다가가 그 안의 글들을 천천히 읽어보니.. 시작이 반.. 그렇게 읽어야 됐었구나.. 이반...필요없는 단어를 먼저 떠 올렸군..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로 혼자 소리없이 웃어본다. 뛰어쓰기 없이 정사각형으로 써져 있는 그 글들은 그렇게 나를 잠시 웃음 짓게 만들었다. 투명한 유리문 밖의 나무엔 낙엽 될 빛바랜 잎들이 그 거센 바람과 씨름하듯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바람과 나무사이로 친구의 차가 눈에 들어오자 난 성급히 그 역사를 다람쥐처럼 빠져 나왔다. 그리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친구의 농원으로 갔다. 오백여평이 넘는 하우스에 피어있는 붉은 장미 꽃.. "어머..너무 이쁘다..마치..나를 보는듯 싶구나.." "또..시작이군..ㅎㅎ" 나도 친구와 함께 장미꽃을 묶는다. 가만히 있는게 도와 주는거라는 친구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난 친구가 하는 것처럼 씩씩하게 고무장갑을 끼고 그 위에 다시 두꺼운 가죽장갑을 꼈다. 새까만 가죽 장갑을 끼고나니 왠지 장난끼가 동한 난 주먹 쥔 한손을 감싸안으며 폼을 잡아 본다. "어때..자세 나오지? 내가 말야 왕년에 조직에 몸담고 있을때 말이지~~" "에구..쟈가 오늘 일 다 망치겠네..하하.." 그리곤 난 친구가 알려준대로 가시돋힌 장미꽃을 열송이씩 천천히 정성껏 묶기 시작했다.. 맨 아랫줄에 네송이 다음엔 세송이 다음엔 두송이 맨 마지막에 한송이.. 그렇게 올려놓고는 자동기계로 눌러 찍어내면 삼각형의 예쁜 꽃다발이 만들어 진다.. "와! 어때 나 잘하지 않니?" "에휴~꽃도매점에서 그러겠다.. 우리집에 또 말 안듣는 손님이 왔나보다..하고" "하하.." 신기함에 힘든 줄 모르고 가죽장갑을 뚫고 들어 온 가시도 아랑곳 않은채 부지런히 친구와 함께 장미꽃을 두어시간 묶곤 우린 그 동네의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미희야~ 나 다 배웠으니깐 너희 집 옆에다 농원을 차릴까 해~" "그래 어떤 사람이 지옥사자가 한 5분쉬고 있는 모습 보고 그게 너무 부러워서 자기도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했다더라..ㅎㅎ" "그럼 지금 너가 5분 쉬고 있을때 내가 온거네?" "그렇지" "하하하..거 말되네.." 식당주인 아저씨가 산에서 갖은 버섯을 따오면 그집 아낙이 그 버섯으로 요리를 해서 파는 그 버섯전골집.. 나와 친구의 남편과 셋이서 뜨거운 버섯전골을 맛있게 먹곤 친구 남편이 커피까지 서빙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비아야~ 말로만 인사하지말고 울 신랑 궁뎅이 한번 두둘겨 주라" "너 없을때.." "하하.." 우린 그렇게 점심을 함께 먹곤 둘이 한적하게 가을 산사를 구경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 친구의 집 근처에 있는 장용산 휴양림을 둘러보곤 서대산을 향해 가면서 서서히 붉어지는 가을 산들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소스라치듯 산을 거칠게 ?고 있었고 가끔은 비도 내리고, 햇빛도 비추고 그렇게 변덕스런 날씨가 가을을 서둘러 보내고 있었다. "정말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너무 잘 어울리는 날이네" "그러게.." 그렇게 다듬어지지 않은 서대산 자락을 오르자 순간 입장료를 받는 곳이 나오자 우린 잠시 황당했다. "미희야! 여기 뭐 볼꺼 있니?" "웅 레져시설 있잖아" "돌아 나가자..우리가 무슨 레져 즐길려고 왔니?" "그래도 뭐 볼거 있지 않을까?" "추워 죽겠는데 무슨...미희야~ 요밑에 감나무 많던데 우리 거기가서 익은 홍시라도 있으면 따 먹자.."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ㅎㅎ" 그렇게 두 아줌마들은 몇푼 안되는 돈이지만 추위에 나가기 싫은 게으름으로 산자락을 내려와 길가 옆에 있는 키작은 감나무 옆에다 차를 세웠다. 추위를 엄청 싫어하는 내가 익은 감 하나라도 따 먹을 요량으로 차에서 내려 휘몰아치는 바람을 애써 외면하며 감나무로 향했건만 먹을만한 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왜 그냥 돌아와?" "에이~ 새가 다 쪼아먹었어.." 우린 다시 서대산 자락을 내려오면서 발길 아니 바퀴 닿은데로 길을 향했다. 그렇게 달리는 국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기 너무 멋지다..청주 가로수보다 더 멋진데?" "웅 여기가 예전에 영화 만추..그 곳 촬영지잖아" "아! 그렇구나.." 도로 양옆에 늘어진 나무들.. 하늘을 가린 빛바랜 나뭇잎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순간 우수수 낙엽되어 우리 눈앞에 떨어지더니 차창밖 도로위를 떼지어 나뒹굴며 휩쓸고 지나가는게 아닌가.. "어머머...너무 멋있다.." "그러게.." "미희야~ 내가 시한수 읖어줄께..들어보렴.." "기대는 안하지만 들어볼께..." "음...시몬~ 들리느뇨~ 자동차바퀴가~~ 낙엽 밞는 소리를~~~ 우스스슥...우스스슥..." "하하하" 아..게으른 우리는.. 그렇게 또 황급히 떠나려는 가을을 차안에서 아쉽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웃고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떠나는 가을도.. 게으른.. 우리를...바라보며.. 웃고...있었을까?...울고..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