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보름인가? 베란다 창, 한 귀퉁이에 붉고 여윈
동그란 보름달이 외롭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 마음 속에 수줍게 숨겨논 친구와 이별하게 되었습
니다.
일년 가까이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애잔하게 마음을
주고받던 친구입니다. 통신 속에 만나 얼굴도 모르는
친구지만 얼굴 맞대고 수다 떠는 친구보다 그 마음이
더 섬세하게 내 가슴에 전달되던 그런 사이입니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멀리 외국으로 떠난다는 작별
인사를 그와 내가 속한 어느 동호회게시판에서 읽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나의 펜을 자처하며 다가
왔습니다.
내가 쓴 몇편의 짧은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며
분에 넘치는 격찬을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게재한 탓
에 인연이 맺어진 그였습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평범한 회사원, 그리고 시 습작을 열심히 하는 감성
적인 남자,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그는 감성이 부드럽고 잔잔한 그런 남자였습
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느끼는
것은 꼭 얼굴을 봐야만, 가까이서 보고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가 보낸 몇 귀절의
쪽지에서, 내 글을 꼭 챙겨 읽고 정성으로 촌평을 하
는 그 마음에서, 동호회 행사에서 내 얼굴 좀 비춰달
라는 애교섞인 요구사항에서...나는 그렇게 그와 가
까워 갔습니다.
나를 선택한 친구란에 그의 아이디가 떠있었지만, 나
는 그가 나와 동년배인 남자라는 점, 내 남편과 친구
들에게 쓸데없는 오해는 받기 싫다는 점,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친구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먼저
쪽지를 보내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의 근황과 그가 쓴 시를 늘 관심있게 지켜 봤지만
그 관심은 꼭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응달에서 숨죽
이며 보냈던 애정이었습니다. 오십을 바라보는 여편
네가 주책없이 통신에서 사귄 남자와 히히덕거리는 것
이 얼마나 천박하게 보일까 지례 겁이 나 마음단속을
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그가 가벼운 농담과 함께 안부를 전하
는 쪽지의 답장도 아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단어도
품위있는 것으로 골라쓰는 용의주도함을 나는 잃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그가 나를 헤픈 여자나 가벼운 여
자로 오해하지나 않을까 몹시 조심하면서 말입니다.
내가 그에 보냈던 전폭적인 신뢰와 애정에 손상이 안
가도록 그와 만났던 동호회 회원들은 모두 그를 칭찬
했습니다. 착하고 정중하고, 부지런한 신사라고...정
말로 그런 그를, 나를 좋아해주는 멋진 그 남자를 꼭
한번 실물로 보고 싶었습니다.
행사 때마다, 번개 때마다 그가 나를 청했지만 망서리
고 갈등하다 나는 번번히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통신
속의 친구를 직접 만난들, 일대 일 번개도 아닌데 무슨
큰 불륜이라고 그렇게 모자란 짓을 했을까요?
자료실에 행사 때 찍은 그의 사진을 훔쳐보며 나는 아
쉬움을 달랬습니다. 사진 속의 그는 동호회원들이 칭찬
한 것에 걸맞게 품위 넘치는 사십대 신사의 여유와 부드
러움이 한껏 밴 웃음으로 그렇게 서있었습니다.
내 남편의 울타리에 안존했던 일상이 이렇게 허물어 질
수 있었음을, 그 일탈이 꿈꾸는 사랑이 이렇게 감미로울
수도 있었음을, 가슴 떨리던 나날이었습니다. 그 가슴떨
림의 한조각도 그에게 전하지 못한 채 이별은 다가오고...
내 인생의 끝자락, 가슴 설레이는 무채색 사랑을 이제는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안녕, 이 한마디에 둥실 실려서.
그가 가는 또다른 신세계의 행운을 기원하며...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