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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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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선고 받던 날에....


BY 강가에 2002-09-04

회진을 마친 의사가 가만히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졸지에 남편의 보호자가 된 나는 의사를
따라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일까?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콩닥거린다.


간호사실 앞에서 의사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팔랑팔랑
진료기록부를 넘기더니 작은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한다.

"간암입니다. 간에 3센티정도 종양이 있어요.
그리고 두세개정도의 작은 종양이 더 보입니다.
간경화도 있구요.
환자 본인이 너무 예민한 것 같아서 직접 말씀을
못드리겠어요.
제일 좋은 방법은 간이식이구요.
간으로 가는 동맥을 차단해서 암을 죽이는 색전술을
8회정도 받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분명 어제 아침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까마득해 온다.
갑자기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온갖 정보들이 모두 삭제
되어 버리고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 버린다.
암이라니.
내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아니야. 그럴리가.
오진일 수도 있잖어.
만일 사실이라면 생존기간은 얼마나 되는 걸까?

무엇을 더 물어 볼 시간도 없이 얼굴이 백옥처럼 희디 흰
젊은 의사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홀가분하게
멀리 사라져 버린다.

어찌해야하나.
짧은 순간이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낯선 곳으로 무작정 걸어 가야만하는 여행자처럼
막막하고 아득하다.

병실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생각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밝은 표정을 꾸미고 들어간다.
어쩌면 남편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의사가 나를 은밀히 불러 내는 순간에..

"의사가 뭐래?"
담담한 목소리로 남편이 묻는다.

"으응..
당신 지난번 초음파검사때 양성종양 있다구 그랬잖어.
그게 좀 커졌나봐.
그래서 다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대"

남편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무엇인가를 더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도.. 남편도 침묵한다.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 흐른 뒤.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엔 무슨 일이 생기던지 숨기지 말고 다 내게
말해줘. 의사보고 직접 환자에게 말하라고 하던가.."

때 마침 동생 내외가 병문안을 오고,
오후 내내 직장동료들이며 친구들이 줄을 이어
찾아 왔다.
꽃이며 음료수를 사들고서.
나도 그랬었지.
지인들이 입원했다고 하면 한 두번 그렇게 병문안을
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며
내 자신을 위로했던 때가 있었었지.

늦은 밤.
남편을 홀로 남겨두고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탔다.
차에 올라 타자 마자 하루내내 참고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남편은 머지 않아 영영 내 곁을 떠날 것이다.
난 미망인이 되어 아이들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 보다는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견뎌내야하고
앞으로 몇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들을 고통과 절망속에서
보내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만큼일까.
30여년을 함께 살면서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참 많이 했는데..

일년이면 365일을 술을 마셨다.
잔소리를하고,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주량은 늘어만 가고.
시어머님 말씀처럼 죽어야 끝이 나는 병인가 싶어서
나중엔 그냥 포기하고 살리라 했다.
하지만 30여년을 가족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한 사람인
것을 부정 할 수는 없다.
가여운 사람.
얄미운 사람.
바보! 천치!
자기 몸 이렇게 썩는 줄도 모르고 날마다 술타령이나 하더니..
이제와서 좀 편히 사나 했더니 가족과 이별이라구?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퇴직을 하고부터는 그 스트레스를 밤마다 술로 풀었다.
밖에서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는
늘 또 하나의 술병이 들려져 있었다.
밤마다 술상을 차리고.
어느땐 술잔을 앞에 둔 체로 남편은 앉아서 잠이 들었다.
어지러워진 상을 치울 때면 잠든 남편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었다.

이제 남편은 영원히 술을 마시지 못 할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즐겨했던 것들로 인해서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둔채 홀로 먼 길을 떠나야한다.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가.
남편이 겪어야할 고통보다는 난 내가 감당해야할 날들
때문에 지금 더 괴롭다.

울어서 퉁퉁 부운 눈때문에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계단을 올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 이웃들에게 아직은 나의 아픈 곳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

아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텅 빈 집.
캄캄하다.
더듬더듬 현관 불을 켜고 거실등도 켜고,
낯설다.
분명 아침에 해 놓고 나간 그대로 인데..

찌르르르~~~
전화벨이 울린다.
시동생이다.
형님의 경과를 묻는다.
사실대로 다 이야기를 하니 수화기 저편에선
한숨소리만 들려온다.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혼자 눕기엔 침대가 너무도 넓게 느껴진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지..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딩동~~ 딩동~~
벨이 울린다.
이밤에 누굴까하며 문을 여니 시동생 내외가
황망하게 들어선다.

눈이 빨개진 동서는 내 손을 잡고 아무 말이 없다.
나도 울고, 동서도 울고,..
울어서 해결이 되는 일이면 이렇게 밤이 새도록
울고만 싶다.

밤늦은 시간에 찾아와 준 그들이 너무 고맙다.
함께 슬픔을 나누는 시간에 막막했던 심정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이런저런 일들을 의논하고 그들이 떠나고 난 후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새벽 2시.
잠이 깨어 보니 언제 들어왔던지 두 아이의
방에 불이 켜져있다.
저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빈 자리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
아이들이 받을 충격때문에 못난 에미는 벌써 가슴이
미어지질 듯이 아파온다.

잠옷을 갈아 입으며 옷장에 옷을 거는데
남편의 옷들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양복이며.와이셔츠며, 넥타이까지..
평소엔 그냥 덤덤하게 보였던 것들이 오늘은
서러움을 안고 다가온다.
어찌해야하나..

이제 난 날마다 행복할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덜 행복할 것임이 분명하기에.
그래.
그렇게 사는거야.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려면 우선은 나 자신부터 추스려야 하니까.

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가 되어
난 출발점에 서있다.
때로는 눈물이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만 헤프게
울지는 않으리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 딛는 거야.
그 길이 설사 험한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결코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던가.
이제 남편에 대한 미움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오직 내 곁에서 서둘러 떠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래도 이 모든 현실이 꿈이었으면 정말 좋겠다...